약속
단순히 매너가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를 향한, 자기 바깥을 향한 태도 전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체계적인 조사는 아니었지만 지난 5년을 꽉 채운 집요한 스토킹의 결과라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연애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에 스스로를 아끼지 않고 이입하며, 쉽게 증오에 빠지지 않고, 공동체적이며, 약자를 배려하고, 문화상품에 온당한 대가를 치르길 주저하지 않고, 관심사가 다양하며, 삶을 즐기려는 건강함이 돋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동네의 조그만 낙서, 길가에서 만난 귀여운 동물들을 알아보고 예뻐하는 사람들이라서 연애소설도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작은 것들, 사랑스러운 것들을 알아보는 센서라 해야 할지 안테나라 해야 할지 하여튼 감각 수용체가 고도로 발달한 이 특별한 사람들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남녀를 불문하고 참 세계에 이로운, 반할만한 이들이었다.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 요조,김보통,박현주,정지돈,김소연 외
유리(가명)를 만났다. 봉사를 마음 먹었던 건 꽤 오래 전인데 이제야 용기를 냈다. 혼자서 하기에는 자신이 없어 계속 망설이기만 했다. 내 마음속 작은 공을 쏘아 올릴 수 있었던 건 나를 알기 전부터 기부와 봉사를 이어왔던 연인 덕분이다. 그동안 사귀었던 이들은 이쪽으로 다들 관심은 열려있는 것 같았지만 막상 실천하고 있는 이를 본 적은 없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책임감을 보지 못했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그동안 만나왔던 지난 연인들은 우리의 균열조차 어쩌지 못했다.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았고 회피하기 바빴다. 그 모든 짐을 나 혼자만 짊어지는 것 같은 기분에(너가 늘 잘 해줬는데 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점점 지쳐가다 손을 놓았다.
지금 만나고 있는 연인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껏 봐왔던 모습은 그랬다. 연인이 되기 전부터 알아왔던 사람이기에 신뢰하는 면도 없잖아 있었지만 연인이 된 뒤로도 그는 늘 한결같았다. 매일 나의 하루를 열어주는 변함없는 정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용기를 내 제안해 보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질문했고 긍정의 답이 돌아왔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건 약속이었다. 일단 시작되면 책임감이 필요했다. 깊고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우리 둘의 약속뿐만 아니라 한 아이와의 약속이 걸려있으니 말이다.
10월부터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조심스럽게 기관에 연락했고 내가 기대한 것보다 빠른 답변이 돌아왔다. 물론 유리와 만나기 까지는 두 달이라는 긴 기간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면접, 면담과 조율의 과정, 만남의 만남을 거쳐 드디어 어제 유리를 만났다. 어떤 아이를 만날까 기대와 걱정이 가득했는데 막상 만난 유리는 참 맑았다. 선생님은 유리가 다른 아이들보다 성장이 느리다고 말씀하셨다. 나 또한 어린 시절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늘 한 발자국 느린 아이였으니까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남자아이라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나와 달리 연인은 아이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며 공통점을 찾았다. 바로 축구. 축구를 잘 모르는 내가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대화가 화기애애하게 오갔다. 나는 그 둘의 대화를 지켜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혼자 하지 않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유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유리는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연인은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 그가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는 말에 유리는 반가운 마음을 내비쳤다. 눈을 반짝이며 고양이를 어디서 샀냐고 물었다. 연인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고양이는 사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오래전 연인이 운영하던 카페에 우연히 들어온 길고양이였고, 연인은 그렇게 고양이 집사가 됐다. 7년도 더 지난 일이고 여전히 그 고양이는 연인과 연인의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나는 늘 고양이보다 강아지가 더 귀엽다고 외치던 사람이었는데, 연인을 만나고 고양이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연인의 고양이를 보며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고양이라고 노래를 부른다. 몸과 마음이 지친 날이면 연인이 보내준 고양이 사진과 영상을 보며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유리는 베이비 박스로 보육원에 들어온 아이였다. 이곳이 이 아이의 집이었고 이름 또한 이곳에서 지어졌다고 했다. 유리를 만나기까지 담당 선생님 두 분을 거치면서 천천히 아이에 대해 알아갔다. 아이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질문을 정리해와도 된다는 말씀에 하나부터 열까지 온갖 걸 다 적어가다 손을 멈췄다. 이건 선생님께 여쭤볼 게 아니라 유리와 만나면서 차차 알아가는 게 더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연인 또한 유리를 만나기 전날 나와 같은 고민을 했던지 우리 둘은 카페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웃었다.
자주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약속을 지키면서 아이와 꾸준한 만남을 이어가는 거라 생각했다. 지켜지지 않는 약속은 아이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 테니, 다른 무엇보다 신뢰가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유리와 약속했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만나자고. 기관에 계신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신발장에서 신발을 갈아 신었다. 아이들의 양육을 담당하고 계신 선생님은 유리가 살고 있는 숙사를 설명해 주셨다. 유리는 3층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날이 추워 오들오들 떨던 유리는 우리 두 사람에게 빠르게 인사를 건네고 계단 위로 후다닥 뛰어올라갔다. 우리 둘도 선생님과 인사를 마저 나누고 차에 올랐다.
연인은 나의 안색을 살피며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한동안 답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그의 옆좌석에 앉아있었다. 정리되지 못한 말들이 머릿속을 붕붕 떠다니는 느낌이었고 숙사를 올려다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과는 또 다른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느릿느릿 말이 흘러나왔다. '잘 한 걸까', '괜찮을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나는 것 같았다. 연인은 그런 나를 토닥이며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잘 하지는 못해도 열심히 하면 진심을 다하면 괜찮을 거라는 그의 말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유리와 놀러 가는 날에는 자신의 옆자리가 아니라 어색하더라도 유리와 뒷좌석에 함께 앉았으면 좋겠다고 그가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마음이 한결 더 놓였다. 아이와 처음 만날 때도 우리의 일정보다 아이의 일정을 먼저 생각하는 그의 사려 깊은 모습이 좋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그의 책임감을 다시금 느끼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시작한 거니까 끝까지 책임을 다하자고 했다. 설령 우리 두 사람이 헤어진다 해도 한 달에 한 번은 유리와의 만남을 이어가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나는 이 선택을 후회하지도 걱정하지도 않기로 했다. 다음 달이면 유리와 어디를 가면 좋을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계획을 짜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