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말로 피투성이가 된 기분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토록 불편한 감정이 지속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신인 작가 '재이'와 큰 욕심 없고 성실한 영어 강사 '건우'의 이야기다. 둘은 비혼, 비출산 커플이다. 결혼하지 않고 한 집에 살며 둘만의 알콩달콩한 삶을 이어가던 찰나, 계획에 없던 임신이라는 변수가 찾아온다. 철저하게 피임을 했음에도 0.6%의 가능성을 뚫고 임신이 됐다는 의사의 말에 망연자실하는 재이. 여기서부터 둘의 갈등이 시작된다.
애초에 비출산을 약속했던 둘이기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이가 달갑지 않았던 재이와 달리 건우는 아이를 낳고 키우고 싶어 한다. 낙태를 할 경우 생명이 위험할 수 있음에도 낙태를 하겠다는 재이를 말리며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건우. 재이는 그동안 여성 선배 작가들이 결혼과 출산 후 복귀하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걸 지켜보면서 자신은 절대 아이를 낳지 않겠다 결심했다고 말한다. 온전히 글쓰기에만 매진한 채 살아가고 싶다는 재이의 말에 이기적이라고 답하는 건우. 그녀의 집필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집안일이며 육아를 자신이 다 하겠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건우. 결국 재이는 건우의 설득에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나는 여기서부터 둘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아니, 난 애 키우면서 글 못 써.", "내가 내 인생을 선택하는 게 이기적인 거야?", "난 좋은 작가가 되고 싶어. 엄마까지는 못 해."
"자기와 아이 내가 지키는 거, 그게 내 꿈이야."
둘은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몰랐던 게 아닐까. 평생 글을 쓰며 살고 싶었던 재이와 사랑하는 사람과의 단란한 삶을 꿈꿨던 건우. 평행선을 달리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내가 다 숨이 막혔다. 피투성이 연인이 가리키는 대상이 처음에는 재이일 거라 생각했지만,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건우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이의 태동을 처음 느꼈을 때 건우는 이 모든 상황을 너무나 설레하는 반면, 재이는 자신의 몸 안에 에일리언이 들어있는 것 같다며 불쾌해한다. 10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아이와 소통하지 않는 재이, 글이 써지지 않는다며 임신 중에도 술과 담배를 놓지 못하고 아이를 죽도록 미워하는 재이.
나는 처음에 재이의 모습을 보며 불편하다 생각했지만, 건우는 건우 나름대로 망가져가고 있었다. 성실하게 영어 강사로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쌓아갔던 그였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지나친 욕심이 되어 점점 커지면서 더 많은 것을 갈망하며 자신을 몰아붙인다. 건우의 분노는 어디를 향해, 누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일까. 출산 직전까지 악을 쓰고 싸우며 서로를 탓하는 둘의 모습에 다시 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이는 유산되었고 건우는 교도소에 들어가게 된다. 교도소의 면회로 재회한 둘은 결국 이별을 맞이한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서로가 원하는 삶이 다르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고 인정하며 손을 놓은 것이다.
장장 155분의 긴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였지만 몰입도가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이 영화는 배경음악조차 없다. 유지영 감독은 보통 시나리오를 작업할 때 영감을 주는 음악이나 레퍼런스가 될 음악을 들으며 작업하는데, 이 영화는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어떤 음악도 떠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나마 들리는 배경음이라곤 재이가 두드리는 집요한 타자 소리 정도랄까.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멍하니 보다가 영화관에 불이 켜지고 난 뒤에야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바로 일어나 나가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잠깐 그 자리에 앉아있으려 했는데, 그 잠깐 사이에 뜻밖의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오늘이 영화관에서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상영하는 마지막 날이라 관객과의 대화(GV)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리둥절해하는 동안 무대 앞에 테이블이 빠르게 세팅되더니 이 작품을 만든 유지영 감독이 뒤이어 들어왔다.
오잉? 이게 다 무슨 일이람?
나는 순간 내가 여기에 계속 있어도 되는지, 나가야 하는 건 아닌지, 사전 신청자만 남아있어야 하는 데 눈치 없이 앉아있는 건 아닌지 고민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그 고민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엉겁결에 <에무시네마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하게 된 내가 여전히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사이 장건재 감독의 진행으로 둘의 대화가 시작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놀라운 건 그 공간을 채우는 관객의 수가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1시간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유지영 감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이 자리에 남아있길 정말 잘했다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던 이유를 알아버렸으니까. 감독이 어떠한 의도를 갖고 이 영화를 만들었고, 국가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점을 말하고 싶었는지가 명확하게 그려졌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에도 혼자 영화관을 찾아왔던 게 다행이라 생각될 만큼 그 감상을 오랫동안 이어갈 수 있어 좋았다. 유지영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한 뒤, 많은 이들에게 악플을 받았다고 전했다. 극중 재이의 모습은 감독인 자신의 모습을 많이 투영한 것이라 말했는데, 동거의 경험이 있었던 그녀는 여성이자 엄마이자 아내이자 창작자로서의 역할을 모두 감당해야 하는 모성애 신화를 깨부수고 싶다고 말했다. 주인공 재이가 임신을 한 순간부터 재이는 사라지고 재이의 아이만을 걱정하는 주변 시선들이 있었다. 비혼임에도 불구하고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남자친구의 부모로부터 자연스럽게 간섭과 통제가 시작된다. 분명 둘이서만 행복하자 약속했지만, 아이가 생기면서 얽히고설켜가는 또 다른 관계들, 그 모든 폭력적인 상황을 무력하게 받아들이며 애쓰는 재이의 모습. 책임감, 의무감을 짊어지는 건 당사자지만 정작 부여하는 건, 무례한 타인들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나에게 불편한 감정을 주었던 영화인 건 확실하다. 1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영화에 몰입했던 시간만큼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도 몰입했으니까. 나는 그 영화관에 장장 4시간가량을 앉아있었음에도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을 만큼 이 시간이 강렬했다는 뜻이다. 예상에도 없던 감독과의 만남에 어리둥절했던 것도 잠시, 이 자리가 있었음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왜곡하고 불편한 감정만 떠안은 채 이 영화의 의도를 불쾌하다 여겼을 테니 말이다.
하, 불편하다. 너무 불편해.
근데 유지영 감독은 말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이 불편하기를 바랐다고, 그 괴로움을 함께 느끼길 바랐다고 말이다. 그래야 알 수 있고, 그래야 공감받을 수 있었기에 더 극적으로 몰아가는 면도 없잖아 있었지만 결국 재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건 임신으로 인해 재이라는 주인공을, 아이를 낳는 숙주 정도로 바라보는 주변의 폭력적인 시선과 압박이었다. 정작 그 모든 것을 견뎌내는 건 재이였는데 말이다. 재이가 갖는 불안함과 공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도, 누구도 말하지 못한 그 공포에 대해 신랄하게 파헤치고 표현하고자 했던 감독의 목소리에 나는 이 영화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
저출산 이슈는 여전히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말한다. 그걸 왜 개인에게 물어보냐고 말이다. 재이는 아이를 낳으면 글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확신을 심어준 건 누구일까. 재이일까, 건우일까, 가족들일까, 국가일까. 제도적으로 뒷받침된다고 연일 떠들어대는 뉴스를 보며 나 또한 착잡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아니잖아, 아니면서. 결국 책임은 우리, 아니 내 몫인데 말이다. 피부로 하나도 와닿지 않는 탁상공론 같은 제도적 지원만 말하면서 아이를 낳지 않는 우리 세대를 이기적이라 치부하는 게 맞는 것일까. 낳으라고 종용하는 게 아니라 낳고 싶은 세상을 만드는 게 우선이 아닐까. 저출산 문제를 수치로 따지지 말고 인식을 개선하고 환경을 조성하는 게 우선이 아닐까.
유지영 감독은 이 영화의 제목을 처음에는 <Birth>라고 생각했다가 개봉을 앞둔 시점에서 <나의 피투성이 연인>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 제목은 정미경 작가의 단편 소설 제목과도 같은데, 책의 줄거리와는 무관한 내용이지만 그 책을 읽고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픈 손가락 같은, 피투성이 연인과도 같은 존재라 생각했다"는 답변과 함께 두 사람에게 조금 더 강한 제목을 붙여주고 싶었다 말한다. 끝으로 이번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던 장건재 감독은 <한국이 싫어서>의 감독이다. <한국이 싫어서>는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이자 개막작으로,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2024년 상반기에 개봉 예정이라는데, 진행자로서의 장건재 감독은 부드럽고 균형 잡힌 언어로 공감의 대화를 잘 이어가는 사람 같아서 내년에 개봉할 그의 영화가 더욱 기대되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쓴 소설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에 정말 기뻤는데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신뢰도까지 높아졌으니 행복한 경험이 이렇게 또 쌓여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