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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Jan 18. 2024

왜 읽지 못하게 하는 겁니까

타인의 삶을 엿보고 내 삶의 밑거름으로 삼는 데 소설은 가장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도구이다. 작은 소설책 한 권을 손에 쥔다면, 우리는 어디서든 타인의 삶에 빠져들 수 있다. 비소설이 우리에게 '말'로써 방향성을 제시해준다면, 소설은 '삶'으로써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인간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직설적인 교훈을 꽂아주는 것이 비소설이라면, '흥부와 놀부가 있었는데 흥부는 제비를 치료해준 뒤 부자가 되었고 놀부는 억지로 제비 다리를 부러뜨렸다가 어느 날......' 이라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게 소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개 전자보다는 후자에 마음의 감화를 받는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건조한 엑기스형 한마디보다 '착한 삶'이라는 개념을 형제인 두 인물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이야기가 더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개념을 둘러싼 맥락이 소거된 짧은 말 몇 마디보다, 표정과 말투와 생김새와 습관 등 인간으로서 가진 체취가 생생하게 체감되는 인물들의 삶의 이야기가 훨씬 가깝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정아은



지난주 수요일, 오랜만에 <그래서 책방>을 다녀왔다. 방산시장에 위치한 작은 책방인데, 서울형책방 사업 덕분에 작년부터 알게 된 곳이다. 언제 가도 반갑게 맞아주시는 사장님 부부가 있어 더욱 친근한 곳. 책을 구입해서 보는 것보다 도서관에서 대출해 보는 걸 더 좋아하는 나지만, 이곳에 갈 때만큼은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꼭 구입해오곤 했다. 그리고 그날도 마찬가지. 강민선 작가의 <비생산 소설>과 독립출판된 <집에서 나왔습니다>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사장님은 내가 좋아하는 캐모마일 차를 한잔 내주시며 그동안 나의 근황을 물어보셨다.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책으로 가득 찬 공간의 안온함과 더불어 책 이야기를 마음껏 나눌 수 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했지만 사장님으로부터 씁쓸한 소식을 하나 전해 듣고 말았다.


작년부터 내가 여러 동네 서점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독서 행사와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동네서점이 정부에서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동네서점은 단순히 책 판매만으로는 작가를 초청하거나 글쓰기, 독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에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정부에서 지원해 주던 그 예산이 다 사라졌다고 한다. 만약 행사 진행을 한다 해도 이제는 책방 스스로 그 모든 비용을 감당하며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은 책방 입장에선 당장 이곳을 운영하는 것만으로 늘 벅차다. 아슬아슬하게 존폐 위기에 놓여 있는 곳이 많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동네서점 두 곳도 곧 문을 닫을 것이라는 비보까지 전해 들었다. 특히 두 곳 중 한 곳은 그래도 나름 인지도가 있는 곳이었는데, 그런 곳마저 경영난으로 사라지게 된다면, 그곳보다 더 작고 유명하지 않은 서점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사라지게 된다는 말인가.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속상했고 책방을 나오는 길에도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작년 가을쯤이던가, 문화체육관광부가 2024년도 예산안에 '국민독서문화증진 지원사업' 예산 60억 원가량을 반영하지 않았다는 기사를 접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해당 사업에 부여된 예산 코드 자체가 폐지된다는 기사였다. 심지어 '지역서점 활성화 및 지원사업' 예산 11억 원가량도 예산안에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국민독서문화증진 지원사업과 지역서점 활성화 및 지원사업 예산은 그간 공공도서관과 동네책방에서 열리는 각종 프로그램에 활용되어 왔다. '작가와의 만남', '심야 책방', '독서 동아리 활동', '인문학 강연' 등 책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동네책방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구심점이 되어준 소중한 예산인 것이다.


책방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올해 기사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올해 출판 지원 예산은 429억 원이고, 지난해 예산에 비해 45억 원이 줄었다는 씁쓸한 내용을 접했다. 독서 문화 확산과 출판 산업 육성을 정책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현 정부의 철학이 더욱 차가운 현실로 피부에 와닿았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출판 산업 지원 예산을 맡아 집행하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따르면 독서문화증진 지원사업 예산이 가장 많이 깎였다. 이 예산은 독서 아카데미 운영, 독서 동아리 활동 지원, 대한민국 독서대전 개최 등 풀뿌리 독서문화 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이다. 지난해 배정된 59억 원이 전액 삭감되었고, 직접 지원 대신 물류 인프라 개선 사업 등 업계 전반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재편했다고 설명했지만 개별 서점들에 대한 지원금이 갑자기 중단되면서 올해 예정된 수백 개의 문화사업에 차질이 생겼다고 한다. 특히 이 큰 흐름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작은 독립서점과 동네서점일 것이다. 기사에서 익명을 요구한 모 독립서점의 대표는 "동네 책방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지역 주민이 책을 매개로 소통하는 문화 거점"이라며 "예고도 없이 예산을 삭감한 것은 풀뿌리 문화생태계로서 책방의 공공성을 무시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브런치에서도 종종 나눴지만 나는 독립서점을 애정한다. 각각의 동네를 지역 기반으로 삼아 책뿐만 아니라 지식과 문화의 사랑방 역할까지 톡톡히 해내는 작은 서점들을 아낀다. 그리고 정부도 이를 도왔다. 그동안 정부의 ‘지역서점 경쟁력 강화 사업’과 ‘문화 활동 지원 사업’은 독립서점이 문화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그 지원을 받아 전국 곳곳의 독립서점에서 작가 초청 북토크, 책 모임, 글쓰기 수업 등 많은 문화 활동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올해 그 예산을 대폭 삭감한단다. 문화공간으로서의 독립서점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다. 사실 독립서점에서 다양한 행사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해서 서점에 직접적인 수익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사업에서 받는 예산은 작가를 초청하거나 공간을 대여하는 등 고스란히 행사 운영비로만 쓰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행사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서점의 존재를 알리고, 그런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독서를 조금 더 친근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던 것인데, 그걸 없애겠다니!


천천히 읽고 깊이 사유하는 것보다, 단순하고 편리하게 영상매체로 모든 걸 접하는 게으른 시대가 도래한 만큼, 읽고 쓰는 감각을 더 살려도 모자랄 판에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라는 건가. 물론 책이 아니더라도 읽을 수 있는 매체는 많다. 책이 절대적이라는 말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에 살고 있기 때문에 책 읽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야, 즉 수요가 있어야만 출판시장이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그래야 더 좋은 양질의 책들이 출판될 것이고, 그들이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이 단순한 논리는 누가 봐도 당연하지 않은가. 읽고 쓰는 사람은 여전히 읽고 쓸 테다. 하지만 소수가 다수가 되지 않는 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고, 도태된 시장에서 양질의 콘텐츠를 찾기란 더욱 하늘의 별 따기가 될 것이다. 아날로그 감성을 아무리 내세워봤자 유행에 합류하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문물로 취급당하는 씁쓸함처럼 말이다.


서글픈 마음에 연인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토로하듯 털어놓았다. 많이 속상했던지 내 목소리가 다소 격양되는 게 느껴졌다. 수화기 너머로 묵묵히 나의 의견을 듣던 연인은 그럼 우리라도 더 많이 읽자고, 알리자고, 그리고 책을 사자고 말했다.

그래, 그러자. 그래야겠다. 올해는 더 많이 읽고, 더 많은 책 문화를 경험할 테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홀로 책을 읽으며 나처럼 속상해하고 있을 유니콘들을 찾아 이 문화를 더욱 견고히 만들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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