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연에게서 두어 발치 정도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거리를 두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이유는, 놀랐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무섭기도 했다. 거의 1년 만에 다시 만났으니 무척 반가웠다. 아니 반갑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연과 만날 수 없게 된 뒤로 자주 꿈꿔 오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건 일어날 수 없는 일, 그래서 가슴 아픈 일이었고 어느 시점부터는 애를 써 가며 외면해 온 생각이었다. 꿈에서라도 연을 만나면 며칠 동안 마음이 시렸다.
연은 1년 전 여름에 죽었다.
<내일의 피크닉> 강석희
작년 겨울쯤이던가. <다음 소희>라는 영화를 봤다. 콜센터 실습 중 자살한 특성화고 재학생의 실제 사건을 모티프 삼은 영화로 죽기 전 소희가 겪어온 일들과 죽음 후 그것을 고발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웃었다가 울었다가 분노하기도 하면서 들쑥날쑥 여러 감정이 오갔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힘들었다. 소희는 춤을 추는 것을 가장 좋아하던 평범한 아이였는데, 서서히 시들어가는 모습에 마음이 찢기는 느낌이었다.
이번에 읽은 책도 이 영화와 닮아있었다. 연이라는 아이의 갑작스러운 죽음, 사고사인 줄 알았으나 실은 자살이었던 죽음의 이유를 파헤쳐 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공업계 특성화고등학교 졸업생인 주인공 수안은 스무 살의 보호 종료 아동이다. 그는 보호 종료 때 받은 자립지원금에서 원룸 보증금과 첫 달 월세를 내고 남은 50만 원으로 산 오토바이로 배달업에 종사하고 있다. 콜 배치와 별점, 배달 본사 AI 시스템의 철저한 매뉴얼 관리가 사람을 얼마나 철저하게 극한으로 몰아가는지는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런 수안에게 1년 전에 죽은 연이 나타난다. 수안과 연은 보육원에서 어릴 때부터 함께 차란 친구 사이다. 그들은 함께 공업계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하루빨리 취업해서 보호 종료에 대비할 거라는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입학한 연과 달리 수안은 별다른 생각 없이 연을 따라 그 학교에 입학했다. 연은 같은 열아홉 살이면서 서른아홉 살은 된 사람처럼 수안을 이끌어줬다. 보호 종료 이후의 삶을 자주 고민했고 뭔가를 계속 알아보며 수안에게도 그 정보를 알려줬다. 덕분에 수안은 자신의 몸을 누일 수 있는 작은방 하나는 갖게 되었지만, 연이 죽은 뒤로 수안의 삶은 점점 위태로워졌다.
나는 내 방을 개봉하지 않은 통조림과 비슷하게 여겨 왔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간 나는 통조림의 내용물처럼 그저 부패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어떤 형태로든 썩지 않고 살아만 있는 것. 보호가 종료될 때 내 손에 쥐여진 돈 5백만 원으로 내가 바랄 수 있는 건 딱 그만큼이었다.
2학년 겨울 방학이 끝나기 전에 연은 첫 번째 현장 실습생이 되었다. 실습 부장이 어렵사리 구해 온 곳은 중저가 항공의 콜센터였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선배들에 비해 연은 좋은 조건이라고 말했다. 현장 실습을 가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형편이라고, 사무직이라 높게 쳐주던 콜센터에 가게 된 건 호사라고 말이다. 비록 그 콜센터가 하청의 하청의 하청이었을지라도. 그 일을 하며 연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수안은 귀신의 형태로 찾아온 연을 통해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실습 후 단 한 사람만 연장 계약이 가능하다는 조건으로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함께 일하는 친구가 진상 고객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목도하는 과정에서 연은 스스로를 견디지 못했다. 연은 회사 사람들 사이에서 "친구를 배신한 독한 애"가 되어 있었다. 연이 세상을 떠난 건 현장 점검 일주일 뒤였다. 연의 죽음은 회사와 무관한 일이 되었고, 뉴스나 신문 기사로도 보도되지 않았다. 심장마비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은 생각했다. 전날 퇴근길에 해원과 나눈 대화를. 그리고 후회했다.
해원을 위로하면서도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을 말을 고르던 순간을. 그래서 결국 아무 말도 못 했던 시간을.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바라던 삶을 위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안정된 수입을 위해, 해원에게 하지 않은 말이 있었다.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 모든 일을 바로잡으려면 어디까지 올라가야 했을까. 복수는 누구를 향해야 했을까. 영화 <다음 소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건의 피해자인 소희가 그렇게 된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을 타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학교는 교육청, 교육청은 교육부, 교육부는 노동부를 탓하며 너무나 많은 인과관계가 얽혀 있었다.
나를 죽게 한 것은 누구인가.
폭탄을 넘긴 사람이지. 연은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다른 답이 있을 것 같았고, 진실은 따로 있을 것 같았다. 연은 다시 생각했다. 애초에 폭탄이 없었다면, 만들지 않았다면, 그걸 돌리라고 시키지 않았다면. 연은 누가 폭탄을 만들고 그걸 돌리게 하는지 알고 싶었다. 답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보일 듯 보이지 않았다. 팀장과 환불빌런과 실습 부장 위에 있는 누군가를 상상해 봤지만, 그도 누구 아래에 있을 것이다. 누구 위에 있는 누군가를 계속 생각하다 보면 마지막에는 누가 있을지, 연은 궁금하면서도 두려웠다.
작고 무력한 사람들이 서로를 공격하게 만드는 어떤 존재가 자신을 하찮게 내려다보고 있는 광경을 연은 상상했다.
장마가 지나고 오해는 서서히 풀려간다. 가까운 이들의 마음을 도닥이며 연도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수안은 남겨진 연의 흔적을 보며 연을 기억하다 연의 세계로 초대하는 항공권을 받게 된다. 다소 판타지스러운 설정이 가미된 소설이지만, 이 소설의 큰 줄기는 사실 '판타지 로맨스'다. 보호 종료 아동의 자립 문제와 마이스터 고등학교 학생들의 현장실습이라는 묵직한 이슈를 청소년 문학으로 부드럽게 다뤄낸 것이다. 마치 해리포터의 세계관처럼 9와 4분의 3 기차역 같은 게 실제로 있는 것 같다는 연의 초대권을 끝으로 수안은 탑승일에 맞춰 여행을 준비한다. 연을 만나러 간다. 아마 죽으러 간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아 아닌가? 설마? 그래?)
나는 이 책을 책폴 출판사로부터 받았다. 가제본 독자를 모집하는 글을 통해 말이다. 책폴은 청소년 문학을 중심으로 현재 15권의 책을 만든 출판사다. 가제본이라는 건 처음 받아봤는데, 유유출판사에서 원고를 A4용지 묶음으로 받았을 때처럼, 출간 도서의 형태가 아니었다. 큰 사이즈의 책이었고, 말 그대로 가제본의 상태였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평소 관심 있게 바라보던 자립준비청년(보호 종료 아동)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더불어 올해부터 시작된 유리와의 만남에 대해서도 말이다. 20살이 되어 보육원을 떠나 세상에 첫 발을 내디디는 아이들이 가장 먼저 일할 수 있는 곳은 어떤 곳일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커녕 수많은 기계 중에서도 그 기계의 부속품 중 하나로 취급받는 노동계의 취약점을 우리는 더 많이 고발하고 들춰내야 하지 않을까. 진상 고객이라는 이유로 떠밀리고 떠밀려 가장 약한 누군가가 그들을 상대하고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면, 그건 누군가 말려야 하지 않을까. 사람을 정량적 지표로 수치화할 것이 아니라 한 명의 개인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럴 때면 한없이 무력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업들 중에도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불매운동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 있다. 굳이 이 글에서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너무나 몰지각하게 그 기업의 상품을 소비하고 있다. 그곳에서 반복해서 유사 재해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노동부의 개입은 다소 소극적이다. <다음 소희>에서도 그랬고, 이번에 읽은 <내일의 피크닉>에서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곳에도 노조가 있다. 얼마 전에 회사 라운지에 커피를 내리러 갔다가 지회장님과 우연히 마주쳤다. 원래는 나와 협업하던 부서에 계셨던 팀장님이다. 이제는 노조 지회장으로 일하면서 자신도 몰랐던 수많은 일들과 마주하고 있다며 껄껄 웃으셨다. 다소 쓴웃음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때(?) 같은 업무로 실랑이하던 과거를 떠올리며 근황을 나눴다. 나는 라운지 문을 열고 그분을 돌아보며 나지막이 "힘내십쇼"라고 말했다.
얼마 전에 읽었던 <고통 구경하는 사회>라는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며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라고도 말한다.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 살펴보고, 누가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알아내고, 구조적인 문제점을 파헤쳐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게 동료 시민의 역할이라고 말이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얼마나, 어느 정도의 섬세함으로 머물러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옮아가야 하는지까지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비록 구경으로 시작됐다고 하더라도 그 시선을 멈추지 말기를, 행동이 절대선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올해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 중 하나가 독자 교정이었다. 작년에 유유출판사에서도 책을 받아 그 작업을 했고, 처음 해보는 놀랍고 신기한 일이었다. 이번에 책폴에서 진행한 가제본 작업에 참여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결은 살짝 다를지라도 책과 관련된 일을 조금씩 해가며 나의 독서 세계를 더 넓혀가고 싶다. 더 나아가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도 조금 더 뾰족한 인권 감수성을 품은채 살아가고 싶다. 모두가 행복한 일터는 어려울지라도, 모두가 건강한 일터만큼은 될 수 있기를, 몸도 마음도 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