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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Feb 29. 2024

1인 가구의 기쁨과 (가끔 찾아오는) 슬픔

혹시 댁에 남자 어른 계시나요?
어떻게 그렇게들 쉽게 알아 버리는 걸까, 내가 겪은 일들이 왜 그런 식으로 설명되는 걸까. 궁금해하는 내게 경찰은 또 그러면 전화 달라는 말과 함께 평상시 창문을 닫고 남자 어른이 있는 듯 집을 꾸며두라고 조언하고 돌아갔다. 그게 그의 최선이었다는 걸 알아서, 나는 원인과 결과가 그런 논리인 세상이라면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여자 셋이 살면 창문도 열 수 없는 겁니까, 묻는 대신 창을 걸어 잠갔고 쭉 열지 않았다. 오 년 가까이 환기되지 않는 공간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책을 읽었고 고양이 그림자에도 잠을 설쳤다.

<연중무휴의 사랑> 임지은



30살 생애 처음으로 독립을 했고 혼자만의 일상을 알뜰살뜰 꾸려가는 중이다. 어릴 때부터 자립심이 강해 남들이 한다고 무작정 따라 하는 게 싫었고, 반골기질도 다분했던 터라 지금 나의 삶이 누군가가 보기에는 왜? 굳이? 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 기준에서는 명료했다. 이 길이 맞았다. 성인이 되면 누구나 한 번쯤 혼자만의 공간, 집을 꿈꾸지만 막상 주변에 혼자 사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심심찮게 들려오는 답이 "생각보다 외롭다"였다. 자유를 갈망하며 호기롭게 독립했다가 다시 본가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자신이 어떤 성향인지부터 먼저 파악하고(외로움을 타는지, 타지 않는지) 결정을 해도 늦지 않겠구나 싶었다.


그 점에서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혼자 놀기를 워낙 좋아할뿐더러 혼자만의 시간을 생명수처럼 아끼는 터라 독립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혼자 산다는 이유만으로 외로움의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나의 이 선명한 선이 만나는 상대들에게 외로움을 준 적은 많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누구에게나 각자만의 선이라는 게 있고, 외로움의 정도나 결핍은 저마다 다르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내가 감히 책임질 수도, 책임져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그걸 책임질 수 있다 말하는 게 무책임하다 여겨지기도 하고(내가 뭐라고 감히).


보다시피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되어가다 보니 이런 나의 기질을 말하면 흔히 따라오는 오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집순이일 거라는 생각이다. 이건 해명하고 싶은데, 오히려 반대다. 나는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혼.자.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한다. 자유롭게 말이다. 활동적인 내향인이라고 해야 할까. 주말에 집에만 있는 건 답답하다. 그래서 집에서 뒹굴뒹굴 노는 게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공감하지 않는다. 내 경우 그건, 시간을 축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주말이 너무 아깝게 느껴져서 말이다. 나와의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인데, 새벽 산책부터 시작해서 하루 종일 혼자만의 시간을 잔뜩 보내고 돌아오면 그렇게 충만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끔은 예상치 못하게 혼자만의 삶에 적신호가 켜지는 순간들이 있다. 늦은 밤 집에 돌아가는 길이 대체로 그랬고, 낯선 남자가 따라오는 길이 대체로 그랬다. 주기적으로 가스 검침을 받는 것도, 소독을 하러 찾아오는 누군가도 내 입장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때가 많았다. 혼자 사는 여성이라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해야 했다. 5년 넘게 혼자 사는 동안 그런 일들은 생각보다 꽤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덕분에 나는 집에서 쓰는 모든 물건을 조심조심 다뤘다. 행여나 고장이라도 났다가 수리 기사님을 불러야 할 경우, 머리가 복잡해졌으니까. 누군가가 보기에는 뭘 그렇게까지 조심하나 싶은 일들에 부러 에너지를 쏟는다는 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다. 안전불감증의 반대, 안전민감증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는 기조로 살아가고 있으니. 주변에서도 흔히 혼자 사는 여성들이 위험에 노출되는 이야기를 괴담처럼 간간이 들어왔던 터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벌어질 일은 벌어지고야 만다. 연식이 오래된 건물이라 교체 시기가 찾아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한 일이 나에게는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건 사치일까, 욕심일까. 보일러를 교체해야 했다. 수리 기사님과 일정을 조율하는 과정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심리적 에너지를 쏟았는지. 누가 들으면 '뭘 그렇게나?' 싶은 그 일을 내가 하고 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고 마지막까지 고민에 빠졌다. 아빠에게 SOS를 청할까 했지만, 다 큰 딸내미 뒷바라지도 정도껏이지. 이건 아니다 싶었다. 결국 일은 잘 마무리되었고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걱정이 과했지만 나에게는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었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안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가 사고를 당하는 것보다 실컷 준비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편이 (유난스러워 보여도) 훨씬 낫다고 생각하니까. 나의 에너지는 축날지언정 말이다.


그러니까 잘 했어. 앞으로도 잘 살자.

아프지 말고, 위험해지지 말고, 건강하게!

(후추 스프레이를 교체할 시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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