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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Jan 08. 2024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하나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은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한다.
그것이 동의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녀는 침묵으로 응수하고 있다. 성취가 아니라 성취해나가는 과정에 의미가 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때 만족이 큰 법이라고. 그것이야말로 미래가 실현되는 진짜 방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축복을 비는 마음> 김혜진



한때는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코로나가 이제는 위드 코로나라는 이름으로 익숙해져 간다. 마치 독감처럼 코로나도 하나의 증상이 되어 익숙한 듯 아닌 듯 우리와 일상을 나란히 하고 있다. 바야흐로 3년 전,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때의 일이다. 모든 것이 비대면으로 전환되던 시기, 오프라인 모임들이 하나둘씩 온라인으로 변경되며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해나갔다. 당시 내가 꾸준히 나가던 독서모임도 기류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했다면 좋았겠지만 정착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결핍의 과정에서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하나 찾아왔다.


"교보북살롱 온라인 호스트 모집"이라는 공고를 본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것 같지만, 2019년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교보북살롱은 '즐거운 독서 놀이 문화'를 미션으로 삼아 다양한 독서모임을 운영하고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 모임의 부족함을 느낀 교보북살롱은 기존의 독서 모임 서비스를 전면 개편하여 개개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온라인 독서 문화 커뮤니티'를 만들고자 호스트를 모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달의 모집 기간이 주어졌고, 3개월 동안 온라인 독서모임을 이끌어갈 호스트는 7개의 모임 테마(독서토론형, 스터디형, 생활루틴개선형, 덕후형 등) 중 하나를 정해 자신만의 모임 계획서를 제출하고, 서류와 면접을 거쳐 최종 호스트로 선정되는 시스템이었다. 나만의 모임을 꾸려간다는 생각에 관심이 생겨 도전하게 되었고 서류와 면접을 거쳐 최종 합격 메시지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교보북살롱입니다. 2021 교보북살롱 온라인 호스트에 최종 합격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메일 발송을 위해 연락처를 수집하고 있사오니 아래 설문 작성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나는 그 문자에 답장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내가 생각했던 방향성이 이들과 달랐다. 온라인 면접을 위한 캐주얼 미팅에 참석했을 당시, 다른 호스트들도 함께 했다. 모두 자신만의 뚜렷한 색깔을 갖고 앞으로 어떤 모임을 이끌어 갈 것인지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내가 기획했던 독서모임은 한 권의 문학 작품을 천천히 읽고 사유하며, 그 책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가 오고 가는 모임,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따뜻한 언어를 바탕으로 서로의 삶을 나누며 마음에 평온함을 찾는 그런 모임이었다. 하지만 면접을 진행하면 할수록 교보북살롱의 담당자는 호스트들이 스스로를 브랜딩 해 사람들의 이목을 한 번에 끌 수 있는 인기 있는 모임을 만들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상업성을 띤 가볍지만 재미있는 모임이랄까. 호스트의 단계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비기너부터 베테랑, 마스터, 레전드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고 하고자 하는 욕심만 있다면 얼마든지 금전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 자격을 스스로 포기했다.


작은 일 하나라도 나와 결이 맞지 않으면 과감히 거절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당시에도 그랬고, 그 마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대학생 때도 기자단으로 활동할 기회를 얻었던 적이 있다. 당시에도 서류와 면접 과정에서 경쟁률이 나름 쟁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 오리엔테이션에는 JTBC직원이 참석해 우리에게 직접 교육을 하며 포부를 다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다음 날 담당자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이곳과 함께할 수 없다는 의사를 명확히 담은 내용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하기 싫거나 과분해서가 아니라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결이 달랐기 때문이다.


작년(아직 작년이라는 말이 입에 잘 붙지 않는다)말 새로운 일을 하나 시작했다. 본업이 아닌 또 다른 직업군을 경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무직과는 정반대의 일, 사람을 직접 대면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취업 준비생일 당시 카페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을 되살려 주말에만 해보고자 꼼꼼하게 채용공고를 살폈고, 이것저것 따지며 심혈을 기울여 지원해 일을 시작했다.


평일이 아닌 주말 아침, 진한 커피향이 코끝을 타고 전해져오는 그 기분이 좋았다. 회사가 아닌 또 다른 일터가 생겼다는 사실도 좋았고,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며 일하기 바쁜 내가 사람들과 마주하며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는 과정도 좋았다. 커피 주문이 들어오면 원두를 그라인더에 넣고 버튼을 누른다. 곱게 갈린 원두 가루가 포터 필터에 차곡차곡 쌓인다. 소복이 쌓인 원두가루를 스탬프로 꾹 누르고 뒤편으로 톡톡 쳐서 가루를 털어낸다. 쏟아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다시 한번 꾹 누르고 커피 머신에 고정시킨다. 포터 필터를 타고 진한 에스프레소의 향이 느껴진다. 막 내린 원액을 들어온 주문에 맞게 우유와 물에 적절히 넣는다. 그 모든 과정이 좋았다. 생업을 위한 일자리가 아닌 내가 하고 싶어 얻은 일자리였고, 아직은 서툴고 미숙하지만 출근 1시간 전부터 카페 근처에 도착해 새로운 일로 하루를 시작하는 마음도 좋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번에도 이유는 명확했다. 그들(업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이미 마음이 굳혀졌다. 부당한 것을 마땅히 지적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다. 지난한 과정을 감당하며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는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러냐고, 유별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기자단과 교보북살롱처럼 나와 결이 맞지 않는 것을 과감히 거절할 수 있는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았다. 생계형이 아닌 이상 더더욱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지속 가능성을 바탕으로 한 꾸준함과 성실함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그리고 이런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 주로 펜을 잡았다.


쓰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날이 있다. 오늘의 이 사건을 기리기리 기억하리의 느낌도 있고, 이건 글로 꼭 남겨야만 할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온다. 유명한 맛집을 찾아갔을 때 맛이 좋으면 성공하는 것이고, 맛이 없어 실패하면 글로 남기면 된다는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인생이 즐거우면 그 자체로 즐기고 인생이 힘들면 그 자체로 하나의 글감이 되는 것이다. 작은 실패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이다보면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보는 안목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나라는 사람에 대해 한 뼘 더 알아간 기분이다. 실패라 칭했지만 실은 실패가 아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올해도 나는 여전히 새로운 것들을 발굴하고 있다. 나와 결이 맞는 것들로 밀도 있게 삶을 채워가고자 하는 마음 덕분이다. 이번 글과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독서모임을 구상 중이다. 브런치를 통해 알게 된 작가님과 함께 만들어갈 모임을 차곡차곡 계획하고 있다. 우리는 느리게 소통하며 결을 다음어 가고 있고, 나 또한 매우 거북이 같은 자세로 그분께 연락을 취하고 있지만(우체통으로 손편지를 주고받는 속도감으로), 그만큼 진심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독서생태계의 형태를 만들 수 있을지 다양한 루트를 생각하고 있다. 답장을 기다리고 계실 작가님이 이 글을 보고 계신다면 나의 머뭇거림과 조심스러움에 조금만 더 기다려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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