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좀 더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서로 친해졌고, 그렇게 쉽게 친해졌다가 쉽게 멀어졌다. 아마 결이 비슷한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멀어지지 않았을 텐데. 하긴 나 스스로 정체성이 똑바로 확립되지 않은 시기였으니, 결을 느낄 새도 없었을 테다.
나의 결을 찾아가는 데만 시간을 한참 쏟아야 했다. 나이가 들수록 어릴 때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진다는 말도 이해는 될 법하다. 나의 결이 정돈되지 않은 시기에 만나서, 결이 정해지며 더 가까워지는 이와 한 걸음 멀어지는 이들이 존재하게 된다.
<계절을 기다리는 마음> 진수빈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이름하여 나의 글생이친구들. 도대체 얼마 만인지, 날짜를 가만히 뒤적여보니 마지막으로 봤던 게 작년 9월쯤이었다. 그 사이 누군가는 결혼을 했고,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를 전하기도 했지만, 그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우리에게는 조금 더 긴 대화의 시간이 필요했다. 서로의 삶을 나눌 수 있는 깊고도 진솔한 대화의 시간 말이다.
각자 사는 지역도 다르고, 이것저것 하는 일들이 많아 서로의 일정을 맞추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건, <계절을 기다리는 마음>에 담긴 문장처럼, 이들이 나와 결이 맞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테다. 결이 정돈되지 않은 시기에 만난 사람들과는 나이를 먹을수록 차근차근 멀어졌다. "자 이제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고 헤어지는 관계도 많았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멀어지는 관계도 많았다. 그렇게 사람들은 하나둘 사라져 갔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보통 '친구의 여부'를 질문받는다. 어릴 때는 친구라는 게 뜻하는 의미를 잘 몰랐다. 더 정확히는 나에게 있어 친구란 어떤 의미인지를 스스로가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는 통념이 강하게 자리 잡혀있던 또래집단안에 속해있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말한다. 나에게는 친구가 없다고. 여기서 말하는 친구란 사회적으로 흔히 말하는 의미의 친구일 테다. 서로의 안부를 주기적으로 나누며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은 이제 내 곁에 남아있지 않다. 나이를 먹으면서 또 하나 깨달은 점이 있다면, 나는 어디든 소속되어 있는 걸 부단히도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멀쩡히 잘 있다가도 '소속감'이라는 단어가 내게 부여될 때마다, 발목이 잡힌 것마냥 몸부림치며 털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시 질문에 답한다. 나는 친구가 있다고. 앞에서는 없다더니 갑자기 있다고 말하는 이 모순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다시 답할 수 있다. 나에게 있어 친구란 사회 통념상 정의되는 친구와는 다르다고. 시절인연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내게, 친구란 그때 그 시절 공통의 서사를 간직했다가 시기에 따라 멀어지기도 하고, 다시 만나기도 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다. 마치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안부를 다정히 나누었던 글생이친구들처럼.
<노매드랜드>라는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대사가 있다.
"이 생활을 하면서 가장 좋은 건 영원한 이별이 없다는 거예요.
늘 ‘언젠가 다시 만나자’라고 하죠. 그리곤 만나요."
이 대사처럼, 나에게 있어 친구란 만났다가 또 헤어지고, 그러다 시기가 맞으면 다시 만나는 존재. 우스갯소리처럼 '헤쳐 모여'의 감각을 좋아한다고 종종 말한다. 근데 이 말이 정말 맞긴 하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친구라도, 연인이라도, 부부라도. 자율성이 보장된 관계 안에서만 그 관계는 건강하다 자부할 수 있다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적어도 내 삶은 이제 그 방향으로 확실하게 나아가고 있는 듯하고. 누군가는 이런 내게 차갑다, 미련이 없다, 냉철하다 등등. 온갖 이미지를 부여하지만 글쎄, 나는 그러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고 나의 갈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려 한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결이 맞는 사람들과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순간, 느슨하지만 끈끈한 연대를 이어가며 말이다. 영원하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정확히는 영원하다는 말이 주는 압박감과 안일함이 싫다. 책임을 다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끝내야 하는 관계 앞에서 망설일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소중한 관계라도 영원을 보장받는 순간,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게 내 정념이다.
돌고 돌았는데, 그래서 다시 결론이다. 오랜만에 만난 글생이들과의 만남이 내게 소중했던 건, 나이와 직업, 자라온 환경, 살아갈 환경 등 무엇 하나 공통적이지 않은 우리가 그토록 긴 대화를, 관계를 이어갈 수 있던 건, 그들과 나의 결이 맞기 때문일 테다. 다들 참 멋진 사람들이다. 각자의 환경에서 또 다른 도전을 이어가려 준비하고 있다.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사람들이다. 다시 또 언제 모이게 될지 정확한 날짜를 기약할 수는 없겠지만 조심스레 바라 본다. 부디 이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기를, 느슨하게라도 계속 닿아있기를, 그리고 모두 건강하기를.
덧,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아팠다는 건 안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