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쓰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과거를 말하는 사람은 책을 읽을 수밖에 없나 봐. 책을 읽는 사람은 먼 훗날을 말해도 옛날이야기처럼 시작했다. 기차에 탄 그는 여행에 관한 글을 떠올렸고, 고속열차나 비행기는 여행에 적합하지 않다거나 지난 여행을 곱씹을 수 없다는 그런 의견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이 중요하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빨라지는 것에 맞춰 사람들은 계속 옮겨질 것이다. 그게 중요한 것을 잃게 되는 것이라면 중요한 것을 잃은 사람인 채로 길 위를 지나가고 기차가 멈춘 곳에 도착할 것이다.
(중략)
그도 다른 옛날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처럼 어릴 때부터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 시간이 지금과 상관없이 다른 속도로 흐르는 것이 좋았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고 다른 시간 속에서 친구를 만났다.
<인터내셔널의 밤> 박솔뫼
소설 강의는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이건 마치 이론으로 배운 지식을 막상 현장에 나가 적용할 때 느껴지는 괴리감과도 비슷하다. 그동안의 나는 생각이 닿는 방향대로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계속 써왔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소설의 형태는 인물, 사건, 배경, 시점, 화자에 대한 묘사와 주변 인물과의 관계 등 일일이 고려해야 할 게 정말 많았다. 덕분에 머리가 복잡하다. 맞춤법에 예민하면서도 교정 교열 강의를 듣고 싶지 않았던 이유와도 비슷한데, 원칙에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스토리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막막한 기분, 형식에 묶여 자유로움을 박탈당하는 경험은 여전히 별로다.
무언가를 배우기에 앞서 기본기를 갖추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입시 공부에 그토록 반감을 느꼈던 나였기에(정작 작품을 쓴 작가조차 작품 의도를 모르는 사지선다형의 난해함이란). 작품을 지나치게 분석하는 건 되레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건 마치 잠이 오지 않을 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과도 비슷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원래 내가 잠에 어떻게 들었더라?' 같은, 말 같지도 않은 생각. 정확히는 잠이 드는 방법을 잊어버린다(나만 그런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고 자연스러웠던 것에 어느 순간 이유를 찾아 붙이는 느낌이랄까.
숨 쉬는 방법 아시는 분? 배워보신 분?
그렇다고 지금 배우고 있는 소설 수업이 싫다는 건 아니다. 몰랐던 걸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에서 머리가 깨지는 듯한 느낌은 들지만, 그 신선한 충격이 퍽 즐겁다(쓰고 보니 좀 변태 같기도). 스토리를 어떻게 전개하고, 그 안에 자잘한 일상은 어떤 걸 담을까, 저 인물은 생각과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까, 이 소설의 끝은 어떤 방식으로 맺을까 등만 생각했지 정작 소설의 완결성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소설을 끌고 가는 화자가 주인공인지 관찰자인지에 따라 주변 인물들을 묘사하는 깊이가 다르고, 태도가 다르고, 거기서 파생된 또 다른 형태의 관계가 있다는 건 새로운 충격이었다.
그리고 어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김기태 작가가 18년도에 서유미 작가(지금 내가 듣고 있는 수업의 강사)의 소설 창작 입문 수업을 처음 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 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젊은 작가상 수상을 거쳐 24년도에 서유미 작가에게 자신의 첫 소설집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선물했다고 한다. 마침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되어 있는 김기태 작가의 <보편 교양>을 인상 깊게 읽었던 터라, 그의 첫 소설집이 궁금했는데, 이렇게 또 반가운 이름이 등장하다니?
그런데 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 순간부터 자꾸 욕심이 생겼나 보다. 누구도 닦달하지 않았는데, 무언가를 계속 잃고 싶지 않은 느낌, 그게 바로 글이었다. 더 정확히는 떠오르는 문장들이다. 무언가 쓰고 싶은 게 생기면, 그 문장이 휘발되지 않게 강박적으로 적으려 드는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싶다. 기억력 또한 마찬가지다. 바득바득 기억하려고 애를 쓰곤 하니까. 샤워를 하거나, 길을 걷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기발한 생각과 문장들이 행여나 사라질까 조마조마해 할 때도 많다. 메모할 게 있으면 바로 적어둘 텐데, 갑자기 떠오른 어떤 장면들은 스쳐가듯 지나칠 때가 많고, 그럴 때면 꼭 적을 만한 도구가 없다. 결국 그런 도구를 만날 때까지 입으로 가만히 곱씹다가 손에 도구가 잡히자마자 와다다다 적어내곤 하는데, 이 강박을 어찌 꺾을 수 있을까 싶다.
거기다 알 수 없는 조급함도 있다. 이건 또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싶은데, 왜 버려지지 않는 것일까. 오늘은 문득 새로운 걸 하나 인식했는데, 내가 존경하는 장강명 작가님의 데뷔가 생각보다 늦었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다. 2011년에 『표백』으로 한겨레 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셨다는 사실만 알았지, 등단할 당시 그분의 나이에 대해 인지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정확한 건 지금의 나보다는 많았다는 것, 데뷔가 늦은 편이라는 것.
나와 같은 해 데뷔한 작가 중에는 20대도 여럿이었다. 나는 '서른 즈음에 소설가가 되는 게 적절하고 나는 좀 늦었나 보군'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를 더 먹은 지금 젊은 작가라고 불린다. 뭐여, 이게.
<책 한번 써봅시다> 장강명
그러니까 결론은 무엇을 하든 나이에 제한받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고 그냥 묵묵히 나의 길을 닦아가면 된다는 거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는데, 나 혼자 괜히 조급해진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마저 든다(누가 보면 엄청난 걸작이라도 쓰는 줄). 그래서 오늘 아침부터 새롭게 시작한 게 하나 있다. 별건 아니고 떠오르는 이름이 있을 때마다 노트에 적어두는 것이다. 소설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을 때가 되어서야 마땅한 이름을 찾는 것이 아니라, 괜찮은 이름이 떠오를 때마다 그때그때 적어둬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비유가 조금 그렇긴 한데, 적금하는 마음처럼 말이다(이래 봬도 착실하게 돈 잘 모으는 편). 그리고 이렇게 조금씩 무언가를 그려가고 모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짠! 하고 나만의 진짜 이야기가 완성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조금 더 개연성을 갖춘 구체적인 결의 소설이 말이다.
자, 그러니까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다.
걸음마부터 차근차근 조급해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