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익명으로 해주세요

이 사람이 범인이다 왜 말을 못 하니

by 내민해

나는 살아가면서 일상에 불편함이 찾아와도 그런 부분들에 크게 의의를 제기하지 않는 편이다.

좋은 게 좋은거다라는 생각도 있지만, 다른 무엇보다 나의 신상이 밝혀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직장 내 괴롭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부분을 보면서 부당하다 생각하고, 화가 나도 웬만하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신상이 밝혀졌을 때, 내부 고발자가 되는 것이 두렵고 그들의 보복 또한 무섭기 때문이다.


어릴 때 학교에서도 왕따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하면서, 아무리 익명이라고 말한들 같은 반 아이들이 익명이라는 것에 안심하고 주동자를 지목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다들 그 후에 있을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층간소음도 이와 비슷했다.

관리실에 민원을 넣을까, 연락이라도 해볼까 고민하면서도 쉽사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은 행여나 나의 신상이 밝혀져 그들에게 보복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심지어 혼자 사는 1인 가구 여성은 그들에게 더 만만한 상대일 거라 생각한다.


요즘 층간소음 문제가 화두가 되면서 다들 관리실, 경찰서, 이웃사이센터 등 다양한 곳에 민원을 넣지만, 익명으로 처리되지 못해 되려 보복 소음을 당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덕분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갈 일을 괜히 나의 위치까지 알려지면서 보복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악순환이 되는 것이다.

나도 이 부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계속 참아왔다.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그만)




그러던 어느 평화로운 아침.

아침은 대체로 이웃들이 조용하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 편히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 데, 여자 1호의 비명이 시작되었다.

'아니 도대체 왜 이 아침부터 또 소리를 지르는 거야'

여자 1호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할뿐더러 그날따라 평소보다 더 화가 났다.

계속 참고 있는 내가 정말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출근해서도 온통 내 머릿속을 채운 고민.

'관리실에 연락할까, 말까. 연락해서 뭐라고 말하지. 집 호수를 물어보면 어떻게 하지. 찾아온다고 말하면 어떻게 하지.'

결국 퇴근 직전에 용기를 냈다!

비장하게 핸드폰을 들고 옥상으로 향했다. 거칠게 옥상문을 열고, 연락처에 저장해뒀던 관리실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관리실에서 근무하시는 여자분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녀에게 그간의 일을 말하면서, 한 가지 거짓말을 했다. 나와 남편이 함께 고통받고 있다는 것.

혼자 산다고 말할 수 없어서 남편이 있는 여자인 척했던 것이다.(사실은 아직 미혼인데... 흠)

그녀와 통화를 하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는데,

이 민원을 넣은 것이 내가 처음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그동안 여자의 비명소리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내가 예민했던 것인가'

그 후에 이어지는 그녀의 질문은 나의 호수 였다.

대략적인 층과 위치만 말했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호수를 정확히 알아야 그 근처를 찾아가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벽에 또 비명소리가 들리면 인터폰으로 관리실에 연락을 하라고 했다. 본인들이 그 연락을 받고 그 새벽에 한 집 한 집의 소리를 들어보겠다고. 해결은 해결인데, 이렇게 되면 내 위치가 다 알려지는 게 아닐까.

그들에게 주의를 준다고 달라질 정도로 매너 있는 사람들이라면 애초에 새벽에는 소리를 안 지르지 않았을까. 적어도 이 시간에 소리를 지르면 타인에게 피해가 된다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상식적으로 알만하지 않은가.

여자 직원은 결국 나의 집 호수를 확인하고, 관리소장님께 전화해본다며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네, 소장님. 지금 1004호에서 민원이 들어와서요. 어떤 집인지 모르겠는데, 밑에 집 같다고 하시네요? 거기서 웬 여자분이 새벽 2시에도 막 비명을 지르신데요. 네, 따로 민원 들어온 건 없다고요? 네네, 1004호요! 1004호!!"

소장님이 집 호수를 잘 못 알아들으셨는지 전화기에 대고 연신 나의 집 호수를 소리치듯 말씀하시는 여자 직원분의 목소리를 멍하니 들으면서 아예 그냥 확성기에 대고 '1004호가 민원 넣었어요!라고 온 건물에 소리치지 그러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나의 신상은 다 전달될 테지.(하하)




후회했다.

전화를 끊기 전에 집 호수는 꼭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안심이 되지는 않는다.

나와의 전화를 끊고, 관리사무소 직원들과 소장님, 청소하시는 아주머니 등등 모두에게 "아니 1004호에서 민원이 들어왔는데, 새벽마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여자가 있대요."라고 소문이 퍼져나갈 모습이 눈에 훤한 것은 나의 섣부른 판단과 우려일까.

귓가에 "1004호요! 1004호!"가 메아리쳐 들리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옥상을 떠나지 못하고 벤치에 주저앉아 있었다. 오늘 나의 용기를 후회하며 말이다.

결국 나는 그들에게는 익명이 아니었지만, 이웃들에게는 익명으로 전달될 수 있을까.

내가 민원을 넣었다는 사실이 여자 1호와 남자 1호에게 괜히 알려져 보복 소음으로 돌아온다면?

요즘 층간소음으로 살인도 일어나고, 똥물을 집 앞에 붓기도 한다는데...


나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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