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보여지는 모습이 다가 아니라고 하지만
층간소음의 후유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릴 때의 상처처럼, 트라우마로 자리 잡아 버렸다.
이제는 집 안에서 쉬다가도 조금만 쿵 소리가 들리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다. 내가 내는 작은 소리도 조심스러워졌고, 이웃들의 일상 소음에도 일일이 반응하며 보복성이 아닌가 두려움을 갖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낮에 길을 걸어가다가도 여자 아이들이 큰 소리로 자지러지듯 웃거나 장난치며 욕하는 소리만 들으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질 정도였다.
그나마 소리 지르던 커플은 요즘 잠잠해졌다. 이사를 간 건지, 헤어진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놀란 마음을 다잡으며 조심조심 지내던 어느 날. 우연히 옆집 사람을 만났다.
제대로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약 1년 전,
집 방향 쪽으로 통로를 틀다가 살짝 열린 옆집 문 사이로 어떤 남자가 보였고, 인상이 너무 무섭게 생겨서 놀란 마음에 옆쪽 통로로 방향을 틀고는 다른 호에 사는 척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이후로 1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고, 그 사람이 제발 그 사이에 이사 갔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애써 그의 모습을 지우며 살았다. 가끔 옆집에서 마치 나의 집 쪽으로 쿵쿵거리는 소리를 낼 때마다 귀를 쫑긋 세우며 마음을 졸이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에 층간소음이 발생했었고, 다행히 옆집은 아닐 거라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며 마음을 진정시켰었다.
하지만, 어제 그를 만났다.
남자친구 집에 가려고 현관문을 열고 나와 문을 닫는데, 옆집이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집이 맨 끝 집이라 피할 곳이 없어 그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1년 전 언뜻 봤던 이후로, 이렇게 직접 서로 얼굴을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는데 그가 맞았다. 그 사이 이사를 가기를 간절히, 아주 간절히 바라 왔건만 그는 그 집에 그대로 살고 있었고, 내가 그때 본 그 모습 그대로 험상궂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마블에 진심인 남자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울버린을 닮았다고)
지나친 기우일지도 모르겠지만, 여자 혼자 사는 것을 그에게 정면으로 알려줬다는 생각에 무서웠고, 괜히 범죄의 대상이 될까 두려웠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피할까 하다가 이왕 마주친 거 주눅 들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 당당하게 그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를 향해 갔다. 그와 한 엘리베이터를 타는 게 두려워 계단으로 내려갈까 2초 망설이다가 생각을 바꾸고 벽에 기댄 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여기서 도망가면 내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나를 만만하게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사는 여자지만 당당하다' 아니면, '네가 나를 해하려고 해도 무섭지 않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정작 그는 나를 보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래서 억지로 용기를 쥐어 짜내며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무서워서 벌벌 떨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남자친구에게 전화해서 이제 나간다고 말했고 옆집 남자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는 지하 1층을 눌렀고, 나는 1층을 눌렀다.
그렇게 우리는 반갑지 않은 첫 대면을 하고야 말았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괜찮을 줄 알았다.
차라리 층간소음 이슈가 없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층간소음으로 이미 한차례 무너진 나의 정신력은 울버린을 닮은 옆집 남자까지 버텨낼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범죄의 대상이 되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이 올라왔고, 그의 험악한 인상이 잔상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내 집 문을 따려고 시도하지 않을까, 범죄의 대상으로 나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온갖 망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