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리고 호수를 똑바로 확인하세요

남의 집 비밀번호를 왜 누릅니까

by 내민해

어젯밤 9시 무렵, 평소처럼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고 부드러운 뉴에이지를 들으며 시를 필사하려는 찰나 현관에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이사 와서 처음 듣는 소리였다.

띠 띠 띠-


놀란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굳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손님을 잘 초대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집 안에 있을 때 누군가 나의 집 비밀번호를 눌렀던 적은 전에 사귀던 남자친구가 장난으로 찾아왔던 딱 한 번 뿐이었다. 그때 나는 집 안에서 책을 보다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큰 소리에 화들짝 놀랐었다.

그 일 이후로 현관 보안키에서 소리가 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처음 듣는 소리였다.



마음을 다시 가라앉히고,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차마 현관문을 열어 확인할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귀찮음과 짜증 없이 나를 걱정하며 달려와준 덕분에 마음이 놓였다. 남자친구에게 현관 앞에서 들어올 때 비밀번호를 한 번 눌러봐 달라고 했고, 비밀번호를 잘못 눌렀을 때 아까와 같은 소리가 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즉, 집 안에서 잠금장치를 걸어두었는데, 밖에서 누군가 나의 집 비밀번호 버튼을 누르면 저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누군가가 집 밖에서 나의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는 뜻이다.


딱 한 번이다.

여러 번 눌러서 침입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단 한 번.

남자친구는 자신도 늦은 밤 술에 취해 다른 사람의 집을 자신의 집이라 착각하고, 몇 번이나 비밀번호 키를 누른 적이 있었다고 했다. 우리 오빠도 원룸에 살 때, 외부인이 자신의 집 비밀번호 키를 계속 잘못 눌러서 남자인 자신도 무서웠던 적이 있다고 말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물론 나도 가끔 너무 피곤한 날에는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층에 내릴 때가 있기는 했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위치를 착각한 누군가가 한 번쯤은 실수로 타인의 집 비밀번호를 누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여러 번도 아니고, 딱 한 번 잘못 누르고 그다음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아니면 내가 집 밖으로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올라오지만 그 생각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방문 예정이 없는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나의 집을 찾는다는 것이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간혹 책 속의 주인공들은 낯선 곳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처음 만난 사람들과 어울리고, 모르는 곳에서 늦은 밤 길을 잃어 방황하고, 겨우 구한 숙소의 시설이 별로지만 그래도 잘 수 있는 곳이 있어 다행이라고 말하는 글들을 읽을 때마다 부러웠다. 나는 그렇지 못하니까. 늘 생각하고, 조심하고, 안전에 안전에 안전에 만전을 기해도 예상치 못한 변수까지 막을 수 없고, 그 한 번의 강렬한 기억이 무서운 망상들을 끝도 없이 불러내곤 하니까 말이다.

끊임없이 왜가 올라온다.


왜? 자신의 집을 착각할 수가 있지?

어떤 정신이면 그게 가능하지?

어떻게 하필 나랑 집 방향이 같을 수 있지?

왜 내가 내리는 곳에서 나랑 같이 내리지?

왜 나랑 같은 방향으로 걷지?

왜 굳이 내 옆으로 오지? 내 앞으로 오지?


왜를 달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분석하다 보면 두려움은 끝도 없다. 관리실에 들러 CCTV를 확인할까도 생각했었다. 어쩌면 그분들에게는 자신의 집을 착각해서 타인의 집 비밀번호를 눌러 이웃 간에 의가 상하는 민원이 익숙할 수도 있다. 고작 한 번 누군가가 비밀번호를 잘못 눌렀다고 해서 CCTV를 확인하고 싶다고 말하는 나의 모습이 유난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남들은 이것보다 더 큰일들도 가벼이 넘기는데 고작 이번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다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의 모습이 한심하다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무서운 걸 어떡하라고. 내가 사는 것처럼 남들도 다들 조심조심 살아가면 어디가 덧나나. 왜들 그렇게 부주의하게 살고, 남에게 피해를 주고, 남에게 관심이 많고, 타인의 일상에 함부로 침범하려 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제의 해프닝 덕분에 조용했던 나의 마음이 또다시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처음 층간소음의 비명을 들었을 때, 옆집 남자의 모습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알 수 없는 적과 나홀로 싸우고 있다는 생각에 지독하게 무서웠고, 그 무서움을 오롯이 아는 이가 나 뿐이라는 외로움 속에서 그냥 막연하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이번이 세 번째 사건이다. 누군가 나의 집 현관 비밀번호를 잘못 눌렀다.


아직 나는 내가 괜찮은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