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 없는 사람
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 가진다. 약점은 연약한 부분이라 당연히 상처 입기 쉽다. 상처받는 부위가 예민해지고 거기에서 방어를 위한 촉수가 뻗어 나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약점이 어떻게 취급당하는가를 통해 세상을 읽는 영역이 있다. 약점이 세상을 정찰하기 위한 레이더가 되는 셈이다. 그들은 자주 위축되고 두려움과 자괴감에 빠지지만 그런 태도를 되도록 감춰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약점이 있다는 걸 공유하면 편해지긴 하지만 무시당하는 걸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점을 숨기고 방어하고 또 상처받았을 때 태연하게 보이는 법을 연구하면서 타인을 알아간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약점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나를 조종하고 휘두를 힘을 가진다. 우리는 장점의 도움으로 성취를 얻지만 약점의 만류로 인해 진정 원하던 것을 포기하거나 빼앗긴다. 어쩔 수 없이 약점은 삶의 결핍과 박탈을 관장한다.
- 소설 <빛의 과거 中>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했다. 잦은 병치레와 빈혈로 툭하면 쓰러지거나 주저앉곤 했고, 학창 시절에 남들은 다 한 번씩은 받아본다는 그 흔한 개근상 한번 받아보지 못했다. 꼭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있으면 몸이 반응하는지, 갑작스럽게 어지러움증을 호소하며 친구들에게 업혀간 적도 있었다. 새벽에 응급실을 찾는 일도 꽤 있었는데, 성인이 된 이후로는 2~3년에 한 번씩으로 그나마 줄었다. 오랜 친구들은 나의 증상을 잘 알고 있어, 멀쩡히 잘 놀던 애가 갑자기 자리로 돌아가 주섬주섬 엎드리기 시작하면 '아 얘 또 그 증상 왔나 보다'한다. 그 증상은 단순한 어지러움증이라 생각했는데, 성인이 되고 그나마 진단을 받은 것으로는 전정계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거나 몸이 안 좋으면 일시적으로 그 부분이 마비되면서 어지러움증을 호소하는데, 심한 경우 걸을 수도, 중심을 잡을 수도 없고 그저 가만히 누워있다가 증상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렇다 할 치료방법도 없어 의사선생님은 몸에 시한폭탄을 하나 달고 산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말씀을 참 아무렇지 않게 하셨다.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고. 그 덕분에 조금만 어지러우면 '아 내 몸이 긴장상태구나' 알 수 있지 않냐며 말이다.
자주 아픈 딸은 기능적으로 좋지 못하다. 어딘가 고장 난 사람 취급을 당한다는 것은 내 목소리를 내기에 좋은 위치가 아니다. 물론 사랑받기에 좋은 조건도 아니고 말이다. 아픈 사람을 옆에서 챙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챙기는 사람도 챙김을 받는 사람도 마음이 상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아픈 나를 많이 힘들어하셨다. 나에 비해 지나치게 건강한 오빠 덕분에 더 비교가 돼서인지 모르겠지만, 뭘 시키려고만 하면 아파버린다고 꾀병 아니냐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참을성이 없다고, 끈기가 부족하다고, 하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거 아니냐고. 같이 병원 가는 길이면 지겹다는 듯 한숨을 푹푹 쉬는 엄마 옆을 나란히 걸으며 나를 원망했던 날이 많았다. 왜 이렇게 허약하게 태어나서 엄마와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할까. 좀 건강하지. 아니면 차라리 아파 죽어버리던가.
물론 아픈 사람을 돌본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지치는 일인지 알고 있다. 다만 그 모습을 나에게 보이지 않을 수는 없었을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지겨웠겠지. 그래, 이해는 간다. 다만 티를 내지 않을 수는 있었잖아.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때부터 내 기저에 깔린 생각은 아프면 버려진다는 것이었다. 아픈 건 고장이 난 거고, 고장 난 물건은 쓸모가 없다. 쓸모가 없는 물건은 버려진다. 가차 없이. 불량품이 설 곳은 없다. 고칠 수 있지만, 멀쩡한 물건을 두고 굳이 고장 난 물건을 고쳐 쓸 사람은 없다. 우리 집은 쓸모가 있어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존재로서의 인정이 아닌, 행위로서만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점점 아파도 아프다 말하지 않았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아프면 언제든지 내 돈을 주고 병원을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의 도움 없이 나 혼자 내 병을 다독일 수 있다는 것이 편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의 병을 귀찮아하고, 짐처럼 여기는 것을 자꾸 직면하다 보면 자연스레 나의 병은 숨기게 된다. 상대방의 한숨을 보고 있는 게 너무 마음 아프니까. 차라리 나 혼자 몰래 아프고 다시 일어나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건강한 척하면 되는 거야라고 되뇌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굴었다.
30살이 되어 집에서 독립한 후로 가족들과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걸려오는 연락도 계속 피했고,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오랜만에 엄마와 전화통화를 하던 날, 수화기 너머로 나의 안부를 묻던 엄마가 "근데 연해야, 건강이 제일 중요해. 알지? 혼자 있어도 잘 챙겨 먹어. 아프면 안 돼"라는 말을 내게 하는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가 딱 하고 끊어진 느낌이었다. 나는 한참 걸어가며 통화를 하다 급제동에 걸린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아프지 말라고? 나한테 아프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아팠을 때 나를 그렇게 짐짝처럼 취급해놓고,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고? 엄마가 어떻게 나한테 건강하라는 말을 해. 어떻게!!!" 길거리라는 것도 잊고 그렇게 난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이 덜덜 떨렸다. 다시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또 나 혼자만의 굴 속으로 들어갔다.
나의 가장 큰 약점이 있다. 처음으로 한 명에게 제대로 말했던 적이 있는데, 그 한 명에게 그 약점으로 버려졌다. 그렇다. 나는 버림받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먼저 버려지는 것. 더 이상 가치가 없는, 쓰임이 다한 사람 취급받는 것.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약점이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이제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씩 오픈하고 있다) 카드다. 나를 통제하려 들 때 그 카드를 이용할까 봐(너 그렇게 행동하면 내가 너 버릴 거야 같은). 그래서 먼저 버린다. 상대방이 조금만 나를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먼저 그 관계를 밀어버린다. 유치하고, 어린 생각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내가 가장 소중했고, 버려질 내가 너무 불쌍하고 애틋해서 그래서 계속 선을 더 선명하게 그어버렸다. 정말 많이 좋아해도 좋아한다는 티를 다 내지 않고, 70의 마음만 내비쳤다. 언제든 손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듯 행동했다. 버려지지 않도록 더 강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약해지면 버려지는 거니까.
사실 나는 아직도 이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기대려 하지 않는다. 나의 마음이 100이라면, 늘 70만 보여주고 싶다. 아직도 나는 이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했다. 자기연민은 하고자 하면 끝이 없다. 그래서 이 글은 나에게 또 두려움이다. 나의 이 글이 누군가에게는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으로 가득 찬 불편할 글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타인의 아픔의 정도를 일정한 기준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 개개인의 아픔은 모두 개인의 영역이니까 말이다.
아직도 나는 먼저 버려질 게 두려워 먼저 버리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