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객관화가 그렇게 어려운가요
네이버 지식백과에 내로남불이라고 검색하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을 줄여 만든 신조어'라고 나온다. 남은 비난하지만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을 일컫는다. 즉 역지사지가 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말은 번지르르한데, 알맹이는 없다.
본인의 삶은 게으르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내가 가장 신뢰하지 못하는 유형의 사람들이다.
대체로 이들은 영향력 있는 말을 늘어놓기를 좋아하며, 본인의 주장을 절대적 선이라 여기고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의 온갖 말에는 당위성을 부여하면서 그 말을 온전히 지키지도 못한다.
더 문제인 것은 자신이 그 말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본인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타인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잔소리하기를 좋아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의 인생을 함부로 다 안다는 듯이 재단한다. 정작 본인들의 말과 행동의 불일치에 대해서는 자신만의 이유로 합리화하기 바쁘면서 말이다.
이제는 그야말로 언택트 시대다. 코로나라는 전 세계의 전염병 때문이다. 그 전염병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기후위기에 심각성을 깨닫고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국가의 노력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개인의 노력 또한 시작되었고, 제로 웨이스트 캠페인, 친환경기업, 채식주의 등 기후변화에 발맞춰 우리의 일상이 다양한 환경문제에 경각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각자의 노력이 타인을 침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실천하고, 남이 실천하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나만 도덕적인 척, 깨어있는 척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착한 소비도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고, 그럴 여건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조차 사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스트라리의 사회학자인 라우라 비스뵈크의 <내 안의 차별주의자>에서 저자는 환경보호도 특권이며 능력이 되어야 지속 가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속 가능한 라이프 스타일은 먼저 그럴 능력이 되어야 누릴 수 있다. 남들보다 도덕적인 인성을 갖추자면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일상을 친환경 기준에 맞추려면 지속적인 자기 교육과 굳건한 확신이 필요하다. 아시아에서 수입한 대나무 칫솔이 자기 나라에서 플라스틱으로 생산한 칫솔보다 더 자원을 보호할까? 내가 콩 제품을 구입하면 원시림이 훼손될까?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친환경 소비는 유식하다는 우월감과 한패다. 원하건 원치 않건 농약 뿌려 키운 싸구려 커피를 할인 매장에서 구입하는 사람들을 깔보게 된다. 도덕적인 주체로서 돈이 없고 시간이 없으며 소비 문제에 무지한 사람들을 속으로 무시하게 된다. 하지만 더 나은 세상의 비전은 인간에 대한 관심과도 함께 가야 하지 않을까?
(중략)
정직한 공동체는 윤리적으로도 바람직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런 공동체는 물질적 차이나 교육 수준의 차이가 도덕적 불평등으로 이어지지 않고 서로 다른 시각을 관용으로 대할 수 있을 때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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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 소비와 실천도 중요하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시간과 돈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는 그 시간과 돈조차 사치가 될 수 있고, 환경과 건강을 생각하는 신중한 식습관은 교육 및 수입과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 부분 또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도덕적 우월감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넷제로니, 기후 위기니, 환경보호니 말로는 그럴듯한 운동들을 떠들어 대면서 정작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 하나 줍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당장 내 방에 이부자리도 제대로 개지 않는 사람이 대의(?)를 위해서 남들 앞에서 그럴듯하게 말만 떠들어댄다면 그 진실을 아는 이들은 얼마나 그를 한심하게 생각할까.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다.
본인의 이분법적인 판단과 당위성으로 타인의 행동을 쉽게 판단하고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누구나 부족함이 있기에 인간답고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한다. 대의도 중요하지만 당장 옆에 있는 이의 아픔조차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우리에게 남은 일은 죽을 때까지 다른 언어를 배우고 헤아리는 것"이라는 모 작가의 말처럼, 타인과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만이 그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대의를 위한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