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말 좀 하면 안 될까?

좋은 대화란 무엇일까

by 내민해

얼마 전에 이슬아 작가와 남궁인 작가의 공저인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문학동네에서 발간한 서간에세이 중 한 작품으로 두 작가가 한 편씩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글이 전개된다. 제목 그대로 둘 사이 오고 가는 편지 속에 오묘한 오해의 지점들이 여러 개 발견되는데, 두 작가 특유의 대처법들이 참 유쾌하다. 남궁인 작가는 대체로 미안해하거나 해명하기 바쁘고, 이슬아 작가는 그런 남궁인 작가를 호되게 나무라곤 한다. 그 과정에서 책 말미에 이슬아 작가는 남궁인 작가에게 다시 한번 일침을 날린다.


"선생님의 글에서 수신자가 바로 저이기 때문에 쓰인 문장의 비율은 예상보다 적었다고 느껴집니다. 상대방에 대한 집중도로 따졌을 때 저보다 한참 미약하셨던 겁니다. 선생님은 주로 저에게 혼나시느라, 반성하시느라, 회상하시느라 바쁘셨지요. 그건 남궁인이 남궁인을 재발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슬아 역시 남궁인을 재발견하느라 참 재밌었습니다. 하지만 남궁인이 이슬아를 얼마나 재발견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남궁인 안에서 이슬아는 어떻게 새로워졌습니까? 이것은 부지런히 남궁인을 통과하고자 노력한 친구의 질문입니다.
(중략)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 이 아름다운 문장을 남궁인 선생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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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라는 것은 일방향이 아닌, 양방향의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대화란 상대방을 궁금해하는 마음이 담긴 대화다. 나의 이야기가 이만~큼 많은데, '자 지금부터 나의 이야기(만) 들려줄게'라는 결의를 품은 상대방과의 대화란 그 자체만으로 얼마나 고단한가. 심지어 상대방은 자신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 대화가 끝나고 난 후 상대방은 나에 대해 얼마나 알았을까, 반면에 나는 상대방에 대해 얼마나 알았을까. 꼭 정확하게 5 대 5로 지분을 명확하게 정하자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나의 말과 상대방의 말이 닿아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듣지 않으니 깊이 알리 없고, 알지 못하니 말을 함부로 뱉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감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공감의 시작은 경청이다. 하지만 잘 듣기만 하는 것은 경청이 아니다. 잘 듣고만 있는 것은 일종의 감정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경청은 그 사람의 말을 충분히 듣고, 이해하고, 질문하는 것이다. 여기에 전제는 그 사람의 말을 충분히 깊게 듣고다. 그냥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진심을 다해 들어야 그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남궁인 작가와 이슬아 작가의 서간문도 마찬가지다. 이슬아 작가는 남궁인 작가를 더 알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또 질문하면서 간간이 자신의 이야기를 곁들였다. 말 그대로 이 책은 자신의 에세이가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서간문이기 때문에 수신인을 명확히 한 것이다. 반면 남궁인 작가는 대체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에 바빴다. 해명하기 바빴고, 사과하기에 바빴으므로 이슬아 작가에 대해 알아갈 시간이 부족했을뿐더러 수신인도 명확하지 않았다. 꼭 이슬아 작가가 아니더라도 그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는 계속 오해가 있었다. "오해는 흔하고 이해는 희귀하다"라는 이슬아 작가의 말처럼, 우리 삶 곳곳의 대화도 우선 상대방을 궁금해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주인공을 바라겠지만, 한 발짝 물러나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마음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서로를 궁금해하는 마음의 균형이 적절히 맞아떨어질 때에야 비로소 "아 좋은 대화였어"라고 말할 수 있는 대화가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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