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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Jun 21. 2022

아무튼, 버스

저의 차를 소개할게요

아주 어릴 때부터 멀미가 심해 매번 차를 타는 게 고역이었다. 키미테를 붙이고, 멀미약까지 먹어도 울렁거리는 속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고, 맨 앞자리가 늘 나의 고정석이었다. 특히 명절 때는 편도로 5시간 정도 걸리는 이동거리에 교통체증까지 겹치면서 10시간가량을 차 안에 갇혀 자도 자도 계속 고속도로였던 기억도 떠오른다. 할머니 댁에 도착하자마자 반가울 새도 없이 체력이 방전된 상태로 풀썩 주저앉아 어지러움을 달래곤 했다.

신기한 것은 영원할 것 같던 나의 멀미가 딱히 무슨 치료를 받은 것도 아닌데,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시골의 비포장도로나 꼬불꼬불한 길만 아니면 웬만해서는 멀미가 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버스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경지(?)에도 다다르게 되었고 말이다. 운전면허를 준비할 때도 도로주행을 하다가 멀미가 나면 어쩌나 했던 우려와 달리 뜻밖에 내 안의 라이더 기질을 발견하고, 신나게 연습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내가 타는 차는 매일이 새롭다. 우선 기사님이 매일 다르고, 합승하는 승객들도 매일 다르다(가끔 비슷한 시간대, 비슷한 동선으로 겹치는 분들이 있긴 한데 인사를 건넬 수는 없다). 나는 지하철보다 버스를 좋아한다. 처음 서울에 이사 왔을 때 지하철을 탔는데, 놀이 기구를 탄 것처럼 허공에 붕 뜨는 느낌이 꽤 오래 지속돼서 겁을 먹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은 너무 익숙해져서 이리 휘청 저리 휘청거려도 그러려니 하지만 말이다. 지하철보다 버스가 더 좋은 이유는 창밖의 풍경 때문이다. 버스는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창밖의 풍경이 늘 다채롭다. 도시의 모습도 동네마다 달라서 낯선 동네에서 버스를 탈 때면 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창밖을 향하곤 한다. 자리도 중요한데, 창문의 틀이 눈에 걸리지 않게 통이 큰 창이 있는 자리를 좋아하는 편이다.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 나는 되도록 남들과 출근시간이 겹치지 않게 매우 이른 시간 집을 나서 버스를 탄다. 종종 조조할인을 받을 정도로 이른 출발이긴 하지만 그 시간대만 느낄 수 있는 버스 안의 평온함이 좋다. 일단 승객도 많지 않고, 차가 막히는 시간대가 아니다 보니 속도도 안정감 있다. 겨울에는 밤이 길어져서 이른 새벽의 창밖 풍경은 대체로 어둠이긴 하지만, 늦은 밤의 어둠과 이른 새벽의 어둠은 분위기의 결 자체가 다르게 느껴진다.


친구들 중에도 차가 있는 친구들은 기분전환 겸 늦은 밤 드라이브를 하거나 집에 도착해서 주차까지 마치고도 차 안에 멍하니 앉아 좋아하는 음악을 듣다가 집으로 올라가기도 한다던데, 내 경우에는 버스가 그 역할을 가끔 해준다. 나 혼자만 하는, 남들이 보기에는 도대체 저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놀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아무 버스나 타기다. 가끔 울적하거나 생각이 많은 날 가만히 버스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버스에 올라탄다. 이 놀이의 목적지는 없다. 그저 내 마음에 드는 버스를 골라타고 서울 여기저기를 멍하니 구경하다 다시 출발지로 돌아오는 것이다. 종점을 돌아 출발지로 다시 돌아오는 버스도 있고, 내려서 집 방향으로 갈아타는 경우도 있다. 종점을 찍고 돌아오는 버스는 손님이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그 모든 시간들을 관찰할 수 있다. 나는 그저 이 버스에 탄 수많은 승객 중 한 명에 불과하다 여기고 멍 때리다 가끔 기사님과 둘만 남겨질 때가 있는데, 그때는 조금 민망하기도 하다. 곧 내릴 것 같은 포즈를 취하다가 다른 승객들이 올라타면 그 무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다시 자리에 앉는다.


서울은 늘 분주하다. 나는 그 속에서 일부러 느림을 찾아다니는 사람처럼 행동하곤 한다. 지하철보다 버스가 좋은 또 다른 이유는 버스가 주는 여유로움이 나를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 여유로움 덕분에 내려야 할 곳을 놓치기도 한다. 바로 어제 퇴근길이 그랬다. 버스에서 책을 읽다가 너무 피곤해서 잠깐 잔다는 게 그만 내려야 할 정거장을 5곳이나 지나치고 말았다. 부스스 일어나 멍하게 눈을 뜨고 창밖을 보는데, 낯선 동네의 모습에 두리번거리다 다급히 내려 집까지 한참을 걸어가고 말았다. 원래는 퇴근길에 장을 보고 가려고 했는데, 새로운 동네에 버려진 겸(?) 새로운 마트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장까지 봐왔다. 뭐 사실 하차할 정류장을 지나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다(종점까지 안 간 게 어디야)한 번은 너무 깊이 잠드는 바람에 차고지까지 갔다가 기사님이 깨워주셔서 같이 내렸던 적도 있다. 이렇게 버스와 나의 소중한 추억들은 차곡차곡 쌓여간다. 허허허(애써 미화시키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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