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창작자
네이버 국어사전에 창작의 정의를 검색해 보면,
1. 방안이나 물건 따위를 처음으로 만들어 냄. 또는 그렇게 만들어 낸 방안이나 물건.
2. 예술 작품을 독창적으로 지어냄. 또는 그 예술 작품
3. 거짓으로 지어낸 말이나 일을 비꼬는 말.
나의 창작은 이 세 가지 중 어디에 속하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굳이 따져 본다면 내가 글을 쓰는 행위로써의 창작은 2번에 속할 것인데, 그렇다면 나는 창작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예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맞는가를 다시 생각해 본다.
김신식 비평가는 자신의 저서인 <다소 곤란한 감정>에서 '무가치하다고 간주된 쓰레기에 미적 가치를 부여하는 실천, 그것이 예술이다'라고 말한다.
예술 속에서 버려진 사물을 가치화하는 일은 위계적으로 가장 무가치한 것에 최고의 문화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예술의 강력함과 자유를 과시하는 것이다.
물건이 쓰레기가 된다는 건 물건에 기대하는 신선함이 다 되었다는 뜻이다. 세상은 신선함이 다했다며 물건을 쓰레기 취급하나, 미술은 물건의 신선함이 폐기될 때 비로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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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거친 그의 해석에 조금 놀란 것도 잠시 어쩌면 우리는 예술과 창작이라는 것을 너무 거창한 행위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술이라는 분야는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쓰레기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창작물이 될 수도 있다. 나 또한 매일 글을 쓰며 창작물을 만들어내지만 그 글이 인정받아 책으로 출간될지, 그저 나의 일기장으로 마무리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과정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비록 누군가에게는 무가치하다 평가받을지라도 나에게는 그 자체가 도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이란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잠재된 보물이라 생각하고, 예술을 하는 모든 예술가들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고로 이 공간에 꾸준히 글을 쓰고 있는 나의 행위 자체가 모두 창작의 영역이고, 내 안에 창작자의 영혼은 잘 담겨있다고 자신하게 된다. 만약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 어떨까를 종종 생각해 보지만, 역시나 고개를 젓게 된다. 글쓰기는 내가 좋아하는 창작의 영역이지만, 그것이 나의 직업이 된다면 온전히 즐기고 좋아하기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다 보면 유독 글이 써지지 않는 날이 있다. 아이디어의 고갈 때문이기도 하고, 그냥 쓰기 싫은 날도 있는 것이다. 그럴 때면 생각을 환기시키고자 장소를 옮기거나 평소에 그냥 지나쳤던 것들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해 글을 써 내려간다.
1인 출판사 대표이자 인터뷰어인 이슬아 작가는 <일간 이슬아>를 매일 발행할 당시 마감 시간이 코앞에 닥쳐야 글을 쓰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작가들이 글을 쓰기 전에 아이러니하게도 쓰기 싫어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고 말한다. 괜히 다른 책을 들춰보기도 하고, SNS를 보고, 무엇을 쓸지 막막해하면서 주위를 돌아보곤 하는 시간들이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창작을 하는 과정 속에서도 분명 정체구간은 생길 것이다. 나 또한 그런 날들이 꽤 있었고, 앞으로도 그런 날들은 많을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내 안에 창작자가 없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에게 글쓰기는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자 나를 위로하는 시간이었다. 매일의 기록을 쌓아가는 그 자체만으로 나를 소중히 키워나가는 느낌도 들었다. 그 모든 순간들을 큰 행복이라 여기며 지금까지 왔기에 앞으로도 나는 글 쓰는 창작자로서의 나를 더욱 응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