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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rygallery Aug 19. 2017

[떠나오기] 아파도 떠나야 했던, 나 홀로 제주도.

[소심한 여행기: 떠나 다시 오는 것, 여행]

작년에는 유독 바쁘고 사건 사고도 많았다.

모두 떠나는 휴가 반납하며 공연 올리고, 이제 좀 어디든 떠나볼까 했더니,

왼쪽 손목이 똑 부러져서는... 수술하고 보호대 차고. 그야말로 '좌절'이었다.


친구들과 소소히 세우던 여행 계획은 모두 무산되었고,

여행비로 쓰려했던 비상금은 수술비 입원비로 모두 날리고. 우울했다.


직장인의 1년을 살게 하는, '보상' 과도 같은 여름휴가가 사라지니, 남은 가을 겨울을 살아낼 힘조차 없어졌다.


나는 왜... 대체 내게 왜...라는 비련의 날들을 보내다,


무척이나 좋아하는 제주도가 생각이 났고,

제주도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동생 생각이 났다.

그 밤. 일찍 잠든 동생을 깨워 일정을 통보하고, 예약.


병원 진료 혹은 하반기 공연 일정 혹은 아직 온전하지 못한 왼쪽 손목 등등은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혼자, 떠나기로 했다. 



저 모양 저 꼴을 하고, 퇴근 후에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짐도 간단했다. 백팩 하나에 욱여넣은 간절기 옷들과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는, 온전치 못한 내 왼쪽 팔을 지탱해 주는 소중한 나의 보호대.


카페 문 닫고, 언니 마중 나온 동생 차에 실려, 동생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익숙했다. 나이만큼 쌓이는가 보다... 넉살은...



공연일로 만나, 몇 년을 동고동락하며, 서로 많이 의지했던 동생이었다.

아니, 언니 같은 동생이다.


공연일에 치이고, 타지 생활에 지친 동생은, 어느 날 훌쩍.

부모님이 계신 제주도로 내려가, 이중섭 미술관 초입에 카페를 열었다.


'발을 가만가만 가벼이 내디디는 소리'라는 뜻의 '카페 자박'

맛있는 커피도, 시원한 한라봉 주스도, 동생 손길 닿은 핸드메이드 소품들이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 여유로운 주인장이 있는, '카페 자박'


목마르고 다리 아픈 여행자에게, '쉼'을 주는 곳이었다.


여행 첫날 일정은, '카페 자박' 사장님과 함께 출근하여, 그 근처를 돌기로 했다.


이중섭 미술관을 시작으로, 새섬을 둘러보기로 했다.

근처에 천지연 폭포나 외돌개와 같이, 유명한 관광지는 굳이 가지 않았다. 이미 보기도 했고, 비 오는 제주도를 혼자 걷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가 너무 많이 왔다.

왼손은 보호대를 하고, 오른손 하나로 우산을 들기엔, 너무 힘겨웠다.

우비를 사 입고, 채 막아지지 않아 들이치는 비는 그냥 맞기로 했다.



가난한 화가의 일생이 있었던 '이중섭 미술관'

미술은 알지 못해도, 이중섭의 작품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는 안다.

초중고 교과서를 통해, 법정 의무교육을 통해 듣고 보았으므로, 낯설지 않았다.


보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살아생전 그는 너무 가난했다.

사랑하는 일본인 아내와 함께하지 못했다.

애끓는 남덕(이중섭이 지어준 일본인 아내의 한국 이름)의 시에 울컥 눈물이 났다.


"너무너무 기다려서, 어쩐지 당신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때도 있어요." 

- 남덕의 편지 중 일부 -


아내의 기다림과 그의 가난했던 일생은, 오롯이 명작으로 남았다.


비가 와서, 미술관은 복작이지 않았다.

덕분에, 조용히 고즈넉이 둘러볼 수 있어 좋았다.


미술관과 산책길을 둘러보는 데, 한 시간 반 정도. 여유롭게 거닐고, 10여분을 걸어 새섬으로 향했다.



새섬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다, 거친 바람에 날아가는 줄 알았다.

얇은 우비는 이미 바람을 온통 맞아 다 재껴지고, 비는 그냥 맞기로 했다.


천지연을 갔으면 갔지, 새섬은 단체 관광객들에게는 매력이 없는 곳인가 보다.

덕분에, 마찬가지로 고즈넉이 걸을 수 있었다.

섬을 둘러 숲길을 걷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 순간의 바람과 빗방울 소리. 내가 선곡한 내 음악. 모든 것이 좋았다.



아무도 없는 이 길에서, 너무 좋아 눈물이 날 뻔했다.

지독히 맹렬했던 감성 그대로. 나는 너무 좋았다.




무너지니 기대지 말라는 경고문을,

'나에게 기대지 마세요'라고 읽는다. 이 역시, 혼자서 좋았다.



새섬을 둘러보는데도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사람 많고 복잡하고 긴 코스의 제주도 여행이 싫다면, '이중섭 미술관'과 '새섬' 코스를 추천한다.

머리카락이 뺨을 때리는 바람이 불어도, 우비를 비집고 들어오는 비가 와도, 좋은 것 같다.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다.

서둘로 '카페 자박'으로 돌아오니, 동생의 특별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 고 말할 뻔했다.

사실... 술도 마시면 안 되었다. 수술 후 금주 1달반째 였고, 앞으로 2달은 마시면 안 되었지만.


나 홀로 떠나온 여행길에, 나는 나에게 맥주 한 모금이라는 선물을 주기로 한다.

근 2~3년을 통틀어, 제일 맛있는 맥주를 마시는 순간을, 나는 맞이했다.


오후에는, '카페 자박'에서 쉬기로 했다.

맥주 한 모금에 노곤 노곤하니, 비가 와 일찍 문 닫을 거라는 동생을 기다리기로 했다.


어둑어둑 해 질 무렵 '카페 자박'은 문을 닫았고,

동생은 내 손을 이 끌고 '반 고흐 인사이드; 빛과 음악의 축제'로 향했다.

오전에 이중섭 미술관 봤는데, 왜 또 전시회냐고 툴툴 거였는데... 정말이지, 눈물이 날 만큼 좋았다.

살면서 한 번은 꼭 만나야 할, 그리고 이것 만으로도 제주도 여행은 충분히 가치가 있었던 순간이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눈으로 귀로, 그리고 가슴으로 담았다. 마음 깊이 남았다.



그날 저녁도, 다음날 아침도 비가 너무 많이 왔다.

동생은 주말 장사를 해야 했으므로, 혼자 버스를 타고 여행길에 나설 준비를 했다.

전날 입었던 약하디 약한 우비를 껴 입는데, 동생이 멋지게 차의 핸들을 틀었다.


폭우 수준의 비 속에, 모르는 길을 물어 물어 찾아갈 이 언니가 걱정되었던 동생은,

과감히, 주말 장사를 접기로 한다.

혼자가 아닌 둘이 함께하는 여행이 되었다.


폭우로 혼돈에 빠진 제주도 산길을 달려,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다.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며 꼭 가 보고 싶었던 종달리의 '소심한 책방'


문도 열기 전에 도착해, 아무도 없는 시골길을 찰박찰박 걸으며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 조차도, 여행이었다.




좁은 공간, 서로 양해를 구하고 책장을 둘러보는 곳.

책장은 빼곡히 들어차 있지 않았다.




마케팅이나 광고가 아닌, 주인장들의 진심을 담은 '추천서'

마침 읽고 있었던 '모든 요일의 여행'을 만나 반가웠다. 읽고 있는 책인데도, 추천서를 꼼꼼히 읽어 보게 된다.

느린 진심이 담긴 주인장의 '추천서'를 통해 책을 만나는 것은, 무척 경이로웠다.




'소심한 책방' 곳곳에 노란 세월호 리본이 자리 해 있었다.

우리 아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이곳이, 그저 감사했다.



원체도 서점에 한번 가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자리를 뜨지 않는다.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책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게 너무 좋고 신기해서, 그리고 행복해서.


그런 내가, 취향 저격의 '소심한 책방'을 만났으니, 가벼이 자리를 뜰 수 있었겠는가?

다리 아픈 동생이 옷자락을 잡아끌지 않았다면, 몇 시간이고 기거하는 민폐를 저지를 뻔했다.


언젠가, 이렇게 작은 책방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겨 버렸다.




여행의 마지막 날 밤이, 여지없이 돌아왔다.


술을 한잔 하고, 각자 책을 펼쳤다.

'모든 요일의 기록'을 다 읽을 참이었다.



그리고, 전날까지 보았던 페이지를 넘겨 새로이 맞이한 페이지에서, 지금 제주도 여행에서의 내 마음을 읽었다.



"다시 올 수 있을까.

행복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소화가 될 무렵이면 늘 같은 질문이었다.

다시 올 수 있을까." 

- 모든 요일의 기록 중 -



다시 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까지 목 끝까지 차오른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다시 느낄 수는 없을 것 같다.

같은 곳을 여행하더라도, 그때 그 순간의 감정이, 매번 다른 행복을 만들어 준다.





여행 내내, 한 번의 개임도 없이, 비가 내렸다.

그리고 여행 내내 내 왼팔은 보호대에 갇혀 자유롭지 못했다.

스스로 허하긴 했지만, 술도 많이 마시지 못했다.

동행자가 없는 여행이었지만, 또 혼자는 아니었다.


얇은 우비가 바람에 재껴져 비가 다 들이쳐도 좋았다.

왼팔이 갑갑했지만, 오른손으로 우산도 핸드폰도 책도 들 수 있어 괜찮았다.

한두 잔 마시는 술이 너무 맛있고, 적당한 취기는 여행을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

혼자라서 외로운 시간은 걸었고, 둘이라서 행복한 시간은 따뜻한 수다로 가득 채워졌다.



무언가 '결핍'으로 시작했던 여행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행복으로 충만했었다.



이번 가을에도,

어느 날, 이렇게 훌쩍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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