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체성
도시에서 살던 내 삶은 늘 시계와 경쟁했다.
지하철 문이 닫히기 전에 뛰어야 했고, 점심시간조차 빠르게 흡입하듯 먹어치워야 했다.
약속과 업무가 뒤엉킨 일정표는 한 치의 여백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 나는 늘 ‘뭔가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성과로 자신을 입증하고, 남들의 기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발버둥 치며,
때로는 내 목소리를 억누른 채 살았다.
그러나 시골로 이주하면서 삶은 낯선 장면으로 바뀌었다.
도시에서라면 지나쳤을 흙길 위의 작은 들꽃이 눈에 들어오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공기의 결이 몸으로 느껴졌다.
‘빨리빨리’에 길들여진 나에게,
이곳의 시간은 지나치게 느리게만 흘러가는 듯했지만,
그 느림은 결국 나를 돌아보게 했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나는 이제 누구일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명함도, 직함도 없는 이곳에서 나는 어떻게 불릴 수 있을까?
농사꾼도 아니고, 완전한 시골사람도 아닌 채, 중간쯤에 걸쳐 있는 듯한 내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 공백이 오히려 새로운 자유로 다가왔다.
나는 ‘도시에 살던 나’라는 껍질에서 벗어나, 오롯이 사람으로서의 나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성취나 화려한 경력 대신, 하루를 충만하게 만드는 건 소박한 만족이었다.
이른 아침, 뜨거운 커피 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는 순간.
이웃이 나눈 손수 기른 채소를 식탁 위에 올려놓는 순간.
흙 속에서 갓 딴 감자를 씻으며, 그 고소한 흙냄새에 웃음이 터지는 순간.
그 어떤 성과나 칭찬보다 이런 순간들이 나를 살아있게 했다.
‘느린 삶’은 나에게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가르쳐주었다.
도시에서는 늘 부족한 나를 채찍질했다면,
이곳에서는 불완전한 나조차 따뜻하게 껴안게 되었다.
어제보다 조금 느리게, 그러나 조금 더 깊게 살아가며,
나는 드디어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도시의 나는 세상에 맞추어 살았고,
시골의 나는 나에게 맞추어 산다.
어느 쪽도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제 알겠다.
진짜 나에 가까운 모습은,
남들이 정해준 길 위에서 속도를 다투는 사람이 아니라,
내 안의 리듬을 존중하며 걸어가는 이 모습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조금 더 온전히 나답게 살아간다.
그리고 그 삶의 이름은 아마도 '느림’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