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잊히지 않는 작은 이름 하나.
산책길을 걷던 어느 저녁,
해가 지고 어스름이 퍼질 무렵이었다.
꽃밭 한편, 분홍빛이 스미기 시작한 분꽃들이
조용히 피어나고 있었다.
어르신이 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분꽃이에요. 밤에 피는 꽃이죠.”
나는 깜짝 놀랐다. 늘 이름을 헷갈려하시던 분이,
그렇게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분꽃… 어떻게 아셨어요?”
“어릴 적, 저 꽃이 피면…
‘이제 들어갈 시간이다’라고 어머니가 말하셨거든요.
그 말이 아직도 생각나요.
꽃보다 그 말이 더 오래 남았어요.”
꽃 이름 하나가
한 사람의‘저녁 풍경’을 끌어올렸다.
지금은 가물가물한 그 시절, 하지만 마음 어딘가에는
분꽃의 시간, 어머니의 말투, 노을 진 하늘이
그대로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꽃은… 시간이 되면 피잖아요.
사람도… 자기 시간이 되면 뭔가 기억하는가 봐요.”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잊은 줄 알았던 것들이 어느 순간,
마음의 틈새에서 조용히 피어난다.
마치 분꽃처럼. 어스름 속에서 더 환하게.
햇살이 저물고 세상이 조금씩 고요해질 때,
분꽃은 그제야
자신의 빛을 피운다.
낮의 눈부심 속에서는 조용히 숨어 있다가,
저녁의 부드러운 그림자 속에서
더 선명하게, 더 단정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분의 미소도 그랬다.
소란스러운 하루의 끝자락, 된장국 한 숟갈의 온기 속에서
작게 피어난 그 웃음은 분꽃처럼 은은하고 깊었다.
그 웃음은 누군가에게는 지나칠 수 있는 순간이지만,
내게는 오래도록 남을 하루의 마지막 빛이었다.
나는 그분의 곁에서 그 빛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진짜 따뜻함은 가장 조용한 순간에 피어난다는 것을.
가장 어두운 시간에 더 환하게 빛난다는 것을.
분꽃은 밤이 되어서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만,
그 빛은 낮보다 더 깊은 위로가 된다.
그날의 어스름 속에서 나는 분꽃 한 송이를 마음에 품었다.
그리고 그 향은 지금도 내 안에서 조용히 피어나고 있다.
바쁜 하루 속, 잠시 멈춰 선 순간마다
그 향은 나를 감싼다.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마치 잊고 지낸 마음처럼.
그분의 웃음, 그분의 말투,
그분의 조용한 존재감이 내 안에서 작은 꽃이 되어
하루의 틈마다 피어난다.
그 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 마음을 다독이고,
내 걸음을 부드럽게 만든다.
때로는 그 향이 나를 울게 하고,
때로는 그 향이 나를 웃게 한다.
그분과 함께했던 짧지만 깊은 시간들이
내 안에서 계절처럼 순환하고,
그 향은
언제나 어스름 속에서 더 선명하게 피어난다.
나는 그 향을 잊지 않으려 한다.
아니,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기억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이루는
한 조각의 온기이기 때문이다.
그 온기는 내 말투에 스며 있고,
내 시선에 머물며, 내가 누군가의 곁에 머무를 때
조용히 흘러나온다.
나는 그분에게서 말 없는 다정함을 배웠고,
작은 순간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배웠다.
그분의 하루는 내게 삶의 방식이 되었고,
그분의 온기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곁에 있을 때
조금 더 천천히 걷고, 조금 더 조용히 웃는다.
그분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분은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 존재만으로 내 삶을 바꾸었다.
그 온기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어지고, 더 넓어져서
내 안에서 다른 누군가에게로 조용히 흘러간다.
그렇게 나는 그분의 온기를 닮아가며
조금씩 누군가의 따뜻한 기억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