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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Jun 11. 2020

아이비리그행 친구를 질투했던 찌질이

친구와 나의 우정은 여기서 끝인가요?


두 달 전쯤 뉴욕에 사는 친구랑 카톡을 한 적이 있다. 코로나로 뉴욕에 난리가 났을 때 맨해튼 중심에 살며 날마다 센트럴파크를 지나다니는 친구가 걱정이 되었다. 그녀랑 카톡을 주고받았는데 이미 그녀는 뉴욕 근처 롱아일랜드로 피신해 있었다.


맨해튼의 집값은 살인적이어서 규모가 작은 집에 살면서 근처 롱아일랜드에 세컨드하우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고 한다. 그녀 역시 결혼 후 그런 방식을 따랐다. 친구와 남편은 둘 다 건축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롱아일랜드 한적한 곳에 자신들이 설계하여 집을 지었다. 뉴욕이 번잡스러울 때나 긴 방학중에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친구네 집 마당에 왔다는 평화로운 사슴. 코로나는 인간의 일일뿐.


코로나 창궐로 뉴욕 시민들은 뉴욕 거리를 비우고 다들 집에 틀어박혀 있던지 인근 어딘가로 대피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뉴욕의 거리가 그렇게 한산한 것을 20년간 살면서 처음 봤다며 신기해했다.


친구는 대학 졸업 후 손꼽히는 건축설계사무소에 입사해 경력을 쌓아가다가 홀연 미국 유학행을 택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25년 전 일이다.  그때 아이비리그로 간다고 했는데 사실 지금이나 아이비리그가 많이 알려졌지 나는 그때 그게 무슨 리그전?인가 그랬다.(나만 무식했던 걸까???)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비리그는 야구 리그전이 아닌 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프린스턴 등 미국 북동부의 유명한 8개 사립학교를 일컫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중 한 곳의 대학원에 입학한 사실을 들었다.  그때 나는 엄청 충격을 받았다. 배가 많이 아팠던 것 같다. 야구 리그전 구경 간 줄 알았는데 미국 내에서도 알아준다는 명문대 중 하나. 그곳으로 공부하겠다며 떠나는 그녀를... 나는 질투했었다.


그 감정은 부러움과는 차별되는 질투가 맞았다. 25년 전의 나는 못나게도 친구의 새 인생을 겉으로만 축하하고 속으로는 질투하던 그런 찌질이였다.







그녀와 나는 대학에서 만났다. 둘 다 제때 대학 입학을 못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명문대병에 걸려서 몇 년씩 재수, 삼수 생활을 하다가 끝내 실패하고 마음에 안 드는 대학에 후기 분할(30년 전에는 전기때 다 안 뽑고 몇명씩 자리를 비워 둔 후 후기때 경쟁률을 높여 뽑는 희한한 제도가 있었다.)로 들어간 뼈아픈 추억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름만 올려놓은 대학에서 호시탐탐 자퇴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고등학교 연합동문회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이가 많아 과에서는 누구 하나랑도 친구 하고 싶지 않던 내게 같은 지역 고등학교 출신의 동갑내기 친구들이 '친구하자'며 내미는 손을 나는 흔쾌히 잡았다.


왜냐하면 그 녀석들이 A4용지 여러장에 글자를 인쇄해서 플래카드를 만들어 내가 수업 들은 강의실 복도 벽에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평생 어디 가서 그런 환대를 받아 본 적이 없던 나는 그들의 그런 행동이 신선해 보였다. 그들만의 환대 방식에 마음이 움직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는 거의 5년 만에 그 학교에 입학한 '여자사람' 동문이었기 때문에 그런 환대를 해 준 것이었다.  즉 다시 말하자면 나를 찾아온 친구들은 하나같이 공대생 남자들이었다. 한 7-8명 몰려왔는데 걔네들이랑 술잔을 기울이다가 마음이 통해서 그냥 친구먹기로 해버렸다.  


그 후 그 남사친들이 내게 말했다. '꽤 괜찮은 애' 하나를 소개하겠다고. 그렇게 만난 꽤 괜찮은 애가 '훗날 아이비리그로 떠난 그녀'였다. 그녀는 사실 우리 동문도 아니니 우리랑 놀아야 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아이였는데.... 공대에 드물게 있는 여대생이어서 공대 남자애들에게 추앙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미모가 한몫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학교 다니는 내내 그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은근 그녀를 신경 많이 썼던 것 같다.  그녀는 오빠 한명을 둔 부잣집 외동딸이었고 명석했으며 작고 귀엽고 예뻤다. 당시 나는 무슨 자신감에서였는지. 머리로 보나 외모로 보나 그녀에게 내가 꿀릴 건 없다는 속엣말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녀는 패션 감각도 좋았다. 그렇다고 내가 떨어지지도 않았다.(고 믿고 싶다)


대학시절 내내 멋을 부리고 화장을 하고 손톱 칠을 한(적고 보니 우째 그리 귀찮은 걸 매일 하고 다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나는 공부로도 그녀에게 깨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시험 때도 날밤 세워가며 공부를 해서 늘 좋은 성적을 유지했었다(지금은 하나도 기억도 안 나는, 쓸모없는 ㅜㅜ)


대학에 가자마자 성에 차지 않는 학교와 학과라며 자퇴하려 했던 내가 마지막까지 졸업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의 덕이 컸다. 그녀처럼 잘난 사람도 두말없이 열심히 출석하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데 나 까짓 게 뭐라고 학교를 그만둬?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학교생활 내내 그녀가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학교에서 도망치던지, 학교를 다니되 술만 먹고 놀았던지... 나는 당시 감정의 진폭이 상당히 큰 편이었고 울분도 컸다. 교육제도에 비판적이었고 세상 주류에서 외면당했다는 자격지심이 심했고 정체도 모를 수모를 홀로 만들어내어 감당하고 있었다. 그냥 세상 모든 것에 딴지를 못 걸어 환장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평정심을 찾고.내가 지니고 있는 몇 개 안 되는 것들에 감사하며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녀 포함 나의 많은 남사친들 덕분이었다. 그렇다는 걸 알아도 고마움을 입 밖으로 꺼내 표현한 적은 없었다. 그냥 그들이 눈치껏 내 마음을 알아줬을거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녀가 아이비리그로 떠나고 나서. 내가 그녀에게 평소 가졌던 감정이 우정과 질투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남사친들과 함께 만난다면 모를까. 굳이  나와 그녀 단둘이 만날 이유를 한 번도 찾지 못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래서 나는 뉴욕으로 떠난 그녀는 내 인생에서 곧 사라질 거라 믿었다. 안 보면 멀어지는 건 인지상정이니까 말이다. 그녀는 언젠가 내 친구 목록에서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20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뜬금없이 카톡 보내다가 말고 페이스톡을 하자며 전화를 건다.


"야, 너 뭔데???? 나 머리도 안 감고 있는데 왜 영상통화를 하자는 건데?????"

페이스톡으로 얼굴을 보자마자 내가 외친다.


그러면 그녀가 내게 대꾸한다.

"나는 씻었냐????"

우리는 그렇게 꾀죄죄하게 뻗친 머리로 휴대폰 앞에 앉아 스피커폰으로 대화를 한다.




25년 전 공대 건물 앞에서 남자 애들에게 둘러싸였던 건축학과 여신 그녀와, 우정과 질투심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멋부렸다 공부했다 술 마셨다 화냈다 하던 나.

우리는 서로 못 보던 세월을 뛰어넘어 깨져버릴 듯한 우정을 어떻게 부여잡으며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서로의 적나라한 모습까지 아무렇지 않게 보여줄 수 있을 정도의 우정을 어떻게 간직 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녀와 나는 서로 다른 점이 많다. 일단 그녀는 사소한 건 거의 다 까먹고 중요한 일만 생각하는 타입이고 나는 사소한 것에 연연하느라 중요한 걸 놓치는 스타일이다. 내 성격은 좋게 말하면 섬세하고 예민하지만  안좋게 말하면 자잘하고 쪼잔하다.


옛날의 나는,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면 상대방에 관한 모든 것들을 전부 파악해서 일일이 다 챙겼다. 반면 그녀는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생일도 잘 챙길 줄 모르는 타입이었다. 나는 약속 시간 한 시간 전부터 약속 장소에 가있는 반면 그녀는 약속 시간 30분 후에 나타나곤 했다.


30년 전 처음 만났을 때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다 미숙했는데 나는 특히나 그녀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었던 것 같다. 아마도 자격지심의 발로였지 싶다. 그런 와중에 들은 그녀의 아이비리그행이어서 분명 좀 더 배가 아팠을 거다.



당시 나는 연애를 하고 있었다. 지금의 남편이랑 연애중이었는데 그녀의 얘기를 하며 내가 좀 많이 못나게 굴었던 기억이 있다. '다시 뭐 그 애를 볼 일 있겠어?' '혼자 미국 가서 잘 살겠지 뭐.' 이런 류의 빈정거림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구남친(현남편)에게 막 뱉어냈다.


그때 구남친이 내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고 했던 말이 있다.

"인연을 놔버리기에는 그 친구가 너무 아깝지 않아? 좋은 사람이잖아. 그렇게 놓쳐버리에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거. 너도 알잖아."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때까지 친구에게 섭섭했던 기억들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내가 그녀의 작은 실수에 골몰하여 흠집내며 관계를 끊어버리기에는 그녀에겐 좋은 면이 넘치도록 많았다.


구남친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에게 가졌던 내 마음이 질투였다는 것도, 아프지만 인정해야만 했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굳이 들춰내지 않아도 될 사소한 실수를 긁어 모아 그녀를 외면하려 했구나.... 깨달았다.

"네 주변의 너보다 잘된 사람을 칭찬하고 축하해 줄 만큼의 마음크기를 가졌으면 좋겠어. 그게 결국 네가 잘 되는 길이기도 하고."

구남친은 덧붙여 내게 이런 팩폭도 날렸다. 내가 나보다 잘된 사람을 보면 배 아파한다는 걸 연애하면서 간파한 모양이었다.


사실 내가 구남친을 만났던 이유는 딱 하나, 사람이 웃기고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는 중간중간 내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마다 내가 '이거, 웬 꼰대냐????  확 끊어버려?????' 라고 생각했으면 구남친은 영원한 구남친이 되었겠지만, 내가 그 조언을 받아들이는 귀명창이었기에(어째 글이 점점 자화자찬으로 흐르는 모양새) 그 구남친이 현남편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구남친은 내가 그녀와의 관계나 다른 인간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때마다 파수꾼마냥 지키고 있다가 바람같이 나타나 조목조목 짚으며  35도 쯤 기울어진 '삐딱한 사람'이었던 나를 얼추 정상 비슷하게 곧추세워주었다.


 




그 후 나는 결혼을 했고 그녀가 한국에 올 때마다 동창들과 함께 모여 술을 마신 날은 우리집으로 그녀를 데려와서 재웠다. 그리고 맛은 없지만 밥도 해먹였다. 그녀가 좋아하는 생채무침을 해주려는데 설탕이 떨어져, 자는 그녀 깨워 편의점으로 내보내기도 했다. (설탕 사오라고)


나는 나보다 요리 못하는 그녀 앞에서 온갖 생색을 내며 잘난척을 했고 그때마다 그녀는 '너는 반찬까지도 잘 만드냐?'며 실없는 소리를 해댔다. 그녀는 미국에서 늘 쫓기듯 공부하며 지내서 제 손으로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은 적이 거의 없는 굶주린 야수의 상태였다. 돌도 씹어먹을 지경이라서 내가 만든 그 맛없던 음식들도 꾸역꾸역 잘 먹어 주다가 미국으로 돌아가곤 했다.


한참 후 평생 싱글로만 살 줄 알았던 그녀가 약혼자와 한국에 들어와 결혼식을 올렸을 때도, 몇 해 뒤 그녀의 남편과 동반 귀국했을 때도 나는 남편과 함께 두 사람을 차에 싣고 다니며 서울 일대 투어에 나선 적이 있다.


나의 남편은 그녀의 남편에게 우리나라를 보다 잘 소개하고 싶어 했다. 영어와 안 친한  나는 그녀의 남편과 눈이 마주치면 오로지 썩은 미소로서만 승부를 봤다. 몇 년에 한번씩 그녀는 남편을 두고 혼자서 귀국을 하는데  한국에 오면 꼭 우리집에서 하루 이틀밤을 자고 가며 내 남편과 담합하여 앉은 자리에서 내 흉을 한바가지씩  보고 간다.  


코로나 사태로 롱아일랜드에 갇혀 지내는 동안 그녀는 미국 생활 20년만에 처음으로 그렇게 장을 많이 봤다고  했다.

"300불 어치씩 사서 냉장고에 가득 쟁이면서 미쳤어 미쳤어 했거든. 근데 놀라운 건 며칠도 안 되서 그 많은 걸 다 먹는다는 거야. 우리는 하루에 두끼 먹는데도 무섭게 줄더라. 그러니 세끼 해먹는 너는 얼마나 힘들겠냐????"


한국마트에서 꼬마김치 세봉지 사서 한봉지씩 뜯어 밥과 김에 말아먹는다는 그녀의 얘기를 듣다보면 시간을 쪼개 공부하며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녀는 늘 예측불허인데 카톡하다가 답이 없어서 기다리고 있으면 자기 정수리의 흰머리 가득한 사진을 촬영해서 보낸다.

"너, 흰머리 난다고 까불지 마. 나 이 정도야."


어쩌다 보니 우리는, '단백질 보충을 위해 고기를 먹어라. 계란을 삶아 먹어야 한다' 며 그렇게 서로의 먹거리를 챙길 정도의 나이가 되어버렸다. 먹는게 귀찮고 내 배 부르자고 먹을 걸 굳이 만들어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가 한국에 언제 또 올른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30년을 알고 지냈고 그 사이 산전수전 공중전을 각자의 삶에서 겪어낸 탓에 커다란 기대나 엄청난 목표를 세우며 살지는 않는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아프지 말고 건강하자'라고 덕담을 해준다.


삶이 우리가 뜻한 바대로 흘러가지는 않아도 고달픈 중간중간 지켜보고 함께 해준 벗이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도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인것 같다. 나는 더이상 그녀를 질투하지 않는다. 그녀가 건강하게 살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노안 온 우리는 오타의 달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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