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생각 없이 물건을 샀다.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충동구매로 산 적이 많았다. 오죽하면 물건을 사서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채 몇 년을 보관만 하다가 박스채 그대로 버려 버린 적도 있었다.
사치품이나 명품만을 밝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알뜰살뜰 절약하며 가계부를 쓴 적도 거의 없었다. 뭘 살 때 예산을 염두에 두며 살까 말까 고민한 적도 없었다. 그냥 대충 봐서 필요할 듯하면 다 샀다. 깊은 생각 없이 샀기에 그다지 쓸모가 없는 물건들은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남편이 벌어 오는 돈을 신중히 모으고 사용했다면 아마 지금보다는 훨씬 더 노후대비가 잘 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경제관념이 없던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반평생 가까이 살아오면서도 나는 그게 그다지 부끄러운지도 잘 몰랐다.
그러다가 3년 전부터 소비하지 않는 삶으로 나의 생활 패턴이 바뀌어갔다. 그건 사실 자의라기보다는 환경 탓이 컸다. 당시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뭔가를 구경하고 싶거나 사고 싶은 마음 자체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욕망의 전멸이었다.
일단 3년 가까이 나는 내 옷을 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가방이며 신발도 살 필요가 없었고 기타 액세서리류도 일절 사지 않았다. 그런데도 생활하는 데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낡으면 낡은대로 유행이 지났으면 지난대로 옷가지 몇 개를 이리저리 돌려 활용하면서 지낼 수 있었다. 소비하지 않고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귀한 시간들이 내게 선물처럼 다가왔다.
인생 후반전은 꼭 필요한 것만을 취하면서 살 수 있겠다는 확신도 들었다. 소비할 시간도 욕구도 없어졌으니 물건은 내 인생에서 '그림의 떡'처럼 무의미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아주 가끔 문구점에 가면 사고 싶은 것들이 눈에 띈다. 지금도 책상 서랍에는 쓰지 않고 모아 놓은 문구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얼마전 우연히 들른 문구점에서 파스텔 형광펜과 노트 다섯 권을 사 왔다. 책상위에 굴러다니는 형광펜이 있는데도 새로운 타입의 파스텔 형광펜을 만지작거리는 나를 보면서 언제든 나의 '미친 소비 욕구'가 고개를 들고 살아날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조금 뜨끔했다.
꼭 필요해서 구입한 귀요미 노트들
어쨌든 돈 만원 남짓의 파스텔 형광펜조차. 이걸 살까 말까? 수십 번쯤은 고민했다. 돈 만원이 아까워서라기 보다는 내 인생에 나와 관련을 맺는 물건의 가짓수가 많아지는 것이 이젠 점점 더 부담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달랑 몸뚱이 하나 유지하면서 너무 큰 면적과 과도한 물건들을 지니느라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났다. 3년간 나와 관련된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면서 느끼게 된 감정이었다.
욕망을 최소화하고 소비를 최소화한 그 빈 공간에 내가 진짜 '나'이어야만 하는 이유와 의미를 채우고 싶어졌다. 이제는 정말 그렇게 살고 싶다.
겨우 노트 다섯 권. 형광펜 한 세트 만몇 천원일뿐인데도 내게 필요 없는 소비가 아닐지, 내가 사는 바람에 꼭 필요한 누군가가 못 사게 되는 것은 아닐지를 고민해 본다.
파스텔형광펜. 돈 만원의 기쁨이 참 크다.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내겐 너무 쉬운 소비가 똑같은 하늘 아래 누군가에게는 어렵고도 힘든 소비인 걸 아는 이상.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을 수 없다. 전처럼 똑같이 흥청망청 살아갈 수는 없다.
엄청 늦게 철이 들어 아쉬운 감이 무척 많으나 스스로를 탓하지는 않으려 한다. 율곡 이이는 <자경문>에서 '공부는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니 서두르지도 늦추지도 않는다'라고 말했다.
죽을 때까지 공부해서 내 생각의 오류를 바로잡고 행동을 올바르게 개선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은 이상 자책으로 삶의 순간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내 삶 역시 그렇게 소비되어지는 건 막고 싶다.
돈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곱씹어 생각하면서 쓰지 않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왕 살아가야 한다면 쉬운 쪽보다는 쉽지 않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 늘 옳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바로는 어려운 쪽이 항상 기억에 남았고 그런 순간이 나를 지탱해주며 키워 준 것이 맞았다.
나는 나를 위한 소비를 지양하고 공짜라는 이유로 타인의 재화를 낭비하는 삶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싶다. 멀리멀리 도망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나에게만큼은 물질적으로 조금 더 인색해지려 한다.
꼭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사고 보니 정말 행복해지는 파스텔 형광펜. 열심히 밑줄 긋고 인생 공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