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을 때 나는 틈틈이 혼자 방에 들어간다.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게 싫다거나 불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식사와 정리까지 마치고 난 후에는 방에 들어가 혼자 있고 싶어진다. 누워서 쉬든지 앉아서 무엇인가를 하든지 간에 일정 시간은 반드시 혼자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딸아이나 남편은 거실에서 같이 TV를 보자, 책을 읽자, 이야기를 하자고 하지만 나는 일정 시간 혼자 있은 후에 가족과 함께 있는 걸 택하는 편이다. 가족들 말대로 처음부터 같이 있다 보면 너무 많은 것들이 나의 시야에 들어온다.
특히나 저녁 무렵이면 에너지가 많이 떨어지는데 그 와중에 신경 써야 할 것들까지 눈에 보이면 감당이 잘 안 된다. 에너지가 바닥나면 감정의 조절이 힘들어진다. 그래서 내 나름의 에너지를 끌어올릴 수 있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일명 '예열 타임'이다. 그 예열이 혼자 방에 들어가 있는 동안 천천히 이루어진다. 그때의 '방'은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 되어 준다.
어느 날 책 한 귀퉁이에서 '퍼스널 스페이스'의 의미를 보게 되었다. '퍼스널 스페이스'는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은 공간,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자신만의 물리적 공간을 말한다.
그 내용을 보던 순간 어릴 적 남자 짝꿍과 다투면 책상에 색연필로 금 그어 놓고 넘어오지 못하게 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짝꿍 역시 내 공책이 금을 넘어가면 내 쪽으로 밀쳐 냈다. 우리 둘 다 자신들의 공간으로 상대방이 한 발짝도 넘어올 수 없도록 경계했었는데 이게 바로 '퍼스널 스페이스'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주변의 일정한 공간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의식적인 경계선인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를 가지고 있다.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
버스를 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옆 사람이 없는 빈 좌석으로 가서 앉는다. 잠시 후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타면 빈 좌석이 금세 메워질 거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일단은 혼자 앉는 좌석을 택한다. 굳이 옆 사람이 있는 좌석을 골라 앉지 않는다.
은행 입출금 기계 앞의 바닥에도 고객의 개인적 은행 업무를 뒷사람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접근 방지 테이프가 붙어 있다. 퍼스널 스페이스를 확보해 주는 거라고 여겨진다.
사람은, 타인으로부터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때 편안함과 더불어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다. 전혀 모르는 타인과 너무 가깝게 붙어 있다는 건 어느 면으로 보나 불편하고 부자유스러운 일이니까 말이다.
즉 '퍼스널 스페이스'가 공간에만 한정된 개념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에도 해당이 된다는 의미이다.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 역시 이렇게 말한다.
퍼스널 스페이스는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음의 거리다.
이 퍼스널 스페이스는 나라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1미터 내외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중 가장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나라가 스웨덴이다. 스웨덴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릴 때 아래 사진처럼 옆 사람과의 간격을 거의 2미터 이상 두고 서 있다고 한다. 버스 기다리는 게 아니라 보초를 서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나만 그런 걸까?
버스를 기다리는 스웨덴 사람들
멀찌감치 뚝뚝 떨어진 그들 사이의 거리에서 당신의 영역이 중요한 만큼 나의 영역도 중요해서 침범 받고 싶지 않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스웨덴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과는 눈도 잘 마주치지 않고 멀찍이 거리를 두지만 일단 친해지면 아주 높은 유대감과 친밀도를 유지해 나간다고 한다. 스웨덴 사람들에게는 친해지기 전까지 필요한 물리적 공간(거리)과 마음의 거리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필요한 모양이다.
그러나 스웨덴 사람들의 이런 '퍼스널 스페이스'를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들만의 문화를 이해하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뜻하는 퍼스널 스페이스를 알게 되면 개인의 개별적 특성을 두고 '까칠하다, 예민하다'라고 특정 짓는 실수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누군가는 가족들 속에서도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며 에너지를 끌어 올려야만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처음 보는 사람과 익숙해지기까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 이러한 사실들을 인정하고 기다려 주는 분위가 생겼으면 좋겠다.
기다려 주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쉽게 친해질 수 없는 것이 '퍼스널 스페이스'를 기필코 유지하려는 자들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딸아이가 영화를 보러 백화점 내의 극장에 갔다가 귀여운 스티커와 팔목에 차는 종이밴드, 가방 걸이등을 받아왔다. ‘혼쇼 서비스’로 불리는 백화점의 새로운 서비스를 알리는 홍보용 스티커였다.
자꾸 말걸면 뚁땽해~~~라고 쓰인 스티커
동그란 스티커를 떼내어 자신의 옷 또는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이고 가방걸이를 매달거나 손목에 종이 밴드를 착용하면 된다. 그렇게 타인의 눈에 띄게 혼쇼 아이템을 부착하고 쇼핑을 할 경우, 백화점 내 직원들은 고객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서비스였다.
인터넷만 잠시 검색해 봐도 정보가 쏟아지는 세상. 정보 과잉의 시대. 소비자는 물건을 구매하러 가기 전에 이미 제품의 특성과 가격 비교까지 끝마쳤을 가능성이 높다. 경우에 따라서는 점원보다 고객이 더 많은 정보를 인지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혼자서 여유롭게 쇼핑을 하고 싶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된 혼쇼 서비스. 뭐든 제대로 된 질문이 새로운 가치 창조를 해내는 것이 맞다. 여기서 잠깐, 나도 우리 집에 '유사 혼쇼 서비스'를 도입해 보기로 했다.
집안 일이 끝나고 나면 나는 이내 방으로 숨어든다. 근데 남편과 딸은 종종방문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올때가 있다(안방을 서재로 쓰는 바람에 책장과 안방 화장실을 이용하러 들르는 그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최근에는 방문에 종이도 붙여 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간간이 그냥 들어올 때가 있다. 정신 놓고 있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얼마나 깜짝 놀라는지 모른다.(나는 간작은 여자임ㅜㅜ)
살포시 종이 한장을 붙여놓았다
자꾸 말걸면 뚁땽해!!!
혼쇼 서비스 스티커를 종이 귀퉁이에 붙여 놓았다. 고객들이 혼자 쇼핑하는 시간이 필요하듯 나 역시 혼자 있으면서 독서를 할지, 영화를 볼지, 글을 쓸지, SNS를 할지 내가 하고 싶은 걸 선택하여 즐길 시간이 필요하다.
설령 누군가로부터 불만 섞인 반응을 얻게 될지언정 나만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지키고 가꾸며 혼자만의 시간도 사수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는, 내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아주 조금씩이라도 지켜 나가며 나를 아껴 주는 쪽으로 살고 싶다. 우리는 누구나 다 혼자만의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꿈을 키워나가고 싶은 사람들이니까.
환경이 따라주지 않더라도 나의 필요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혼자만의 시공간을 확보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