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하LeeHa Jul 26. 2020

거침없는 딸의 패잔병 삶은 계란 모음

삶은 그 무엇엔가 누구에겐가 정성을 쏟는 일이란다


딸, 너에게.


코로나로 인해 시간이 많아진 너는

불과 얼마 전까지

"엄마, 앞으로 밥은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지.

'의기양양 스팸 계란 대접 밥'과

'당면 대파 계란탕 부침'과

'깍두기 맛 호박전'을

만들어 내던 너를

딱히 믿었던 건 아니야.

네가 해준 음식 비주얼을 보고 믿음을 갖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더라

(딸아, 당면 대파 계란탕 부침이 뭐니?)


그래도 말이지

그렇게 큰소리를 땅땅 치길래

한번 믿어볼까 했는데

너는 서해의 썰물 빠지듯

주방에서 줄행랑을 치더라.

그럴 줄은 미처 몰랐어.


나는 도망간 탈영병 붙잡아 오듯

'널 불러다가 부엌일을 다시 시킬까????'

하고 생각도 했었지만

너도 잘 알고 있지?!

엄마는 절대 '강요'라는 걸

하지 않는 사람이잖아

아니. 아니지.

엄마가 강요한다고 해도

눈 하나 끔뻑하지 않을 사람이

바로 '너'라고 하는 게 맞겠다.


어쨌든 너는 주방일 몇 번만에

뒤로 나가떨어져서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놀고 있더구나.


엄마가 요새 갑자기 바빠진 거 너도 알지?!

그리고 밥을 20년 넘게 한다고 해도

엄마 손이 굼뜬 것.

역시 알고 있지?!


마음만 바쁘던 나는 결국 못 참고

놀고 있던 너를 불렀지.

"엄마 바쁘니까 삶은 계란 좀 살살 까렴"

그렇게 부탁하고

엄마는 할 일을 했어.


삶은 계란 세 개쯤이야 뭐.

그건 누구라도 너끈히 깔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근데 엄마가 반찬 만들다가 살짝 고개 돌렸을 때

희한한 광경을 봤어.

너는 계란 까는데도 도구를 필요로 하더구나.

갑자기 밥숟가락을 꺼내서

계란 껍데기를 벗기더라.

나 정말 깜짝 놀랐어.



숟가락에 비치는 너의 얼굴, 계란 까러 태어난 사람 같은 비장미가 흘러.



엄마 평생에

숟가락으로 계란 껍데기 까는 사람에 대해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거든.

네가 처음이야.


너는 정말 거침이 없더구나.

불도저처럼 숟가락으로

계란 껍데기를 밀어붙이는데

놀랍더라. 신기했어.

그래서 속으로 그랬지.

'어머, 나도 다음부터는 편하게 숟가락으로

껍데기를 까야겠다. 우리 딸이 참 현명하네.'


너는 1분 30초 만에

계란 껍데기 세 개를 올킬하고

소파에 가서 도로 드러눕더구나.


엄마가 요새 노안이 왔잖니?

계란 껍데기 잘 깠으리라 그냥 믿었지.

일일이 확인은 안 했어.

우리 사이에 치사하게

그런 게 왜 필요하겠어?


샐러드에 넣으려고 계란을 손에 잡는 순간

뭔가 느낌이 이상한 거야.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나, 비명 질렀잖아.


이렇게 누덕누덕 누더기가 된 삶은 계란은

평생 처음 봤어.

계란한테 미안한 마음까지 들더구나.


<패잔병 삶은 계란 모음ㅜㅜ>    

계란이 너무 마이 마이 아파 ㅜㅜ


숟가락한테 된통 혼난 계란 1


숟가락에게 몰매 맞은 계란 2


초토화. 실신 상태 계란 1.2.3



거침없는 딸아,

간간이

브레이크 좀 밟으면서

'거침 좀 있어 주면 안 되겠니?'

천천히 해도 되고

살살해도 된단다.

예쁘게 하면 더 좋지.


전우익 선생님이 쓰신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민겨>에

이런 말이 있다.


"삶이란 그 무엇엔가 그 누구에겐가

정성을 쏟는 일이라고."


그리고 신영복 선생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지.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곧 우리들의 심신의 일부분을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누어 묻는 과정"

이라고 말이야.


우리가 까는 계란 한 알,

서로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에도

정성을 쏟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의 정성을 계란 속에도

서로의 가슴속에도 

나누어 묻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나날들이 모이다 보면

어느덧 우리에게도 믿음이 생기겠지.

우리는 제대로 된 방향으로 걷는 중이라고

잘 살아내 보려고 애쓰는 중인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거야.


'계란 그까짓 것, 대충 까면 뭐 어때?'

물을 수도 있겠다.


그래, 아직 어린 너는 그런 생각할 수 있지.

근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또 다르게 생각해 보기도 하는 게 인생이란다.


그러니 네 맘대로 계란 껍데기를 까다가

어느 날 문득 잘 까고 싶은 생각이 들면

'어라? 내가 왜 이러지? 어제의 나랑 다른데??'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정성을 들여 보기도 했으면 좋겠어.

모든 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서 할 때

의미도, 힘도 생기는 법이니까.


아참. 근데 말이야. 계란 맛은 참 좋더구나.

물론 잘 삶은 내 덕일 거야.


그러나 한바탕 진한 웃음을 안겨준 건

너였다.

네 덕분이었어.


웃으며 또 하루가 이렇게 가는구나.

사랑하는 내 딸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