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브런치북
딸아, 삶의 가장자리 끝으로 가자
09화
실행
신고
라이킷
53
댓글
12
공유
닫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브런치스토리 시작하기
브런치스토리 홈
브런치스토리 나우
브런치스토리 책방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리하LeeHa
Jul 26. 2020
거침없는 딸의 패잔병 삶은 계란 모음
삶은 그 무엇엔가 누구에겐가 정성을 쏟는 일이란다
딸, 너에게.
코로나로 인해 시간이 많아진 너는
불과
얼마
전까지
"엄마,
앞으로
밥은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지
.
'
의기양양 스팸 계란 대접 밥'과
'당면 대파 계란탕
부침
'과
'깍두기 맛 호박전'을
만들어
내던
너를
딱히 믿었던 건 아니야.
네가 해준
음식
비주얼을 보고 믿음을 갖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더라
(
딸아, 당면 대파 계란탕 부침이 뭐니?
)
그래도 말이지
그렇게 큰소리를 땅땅 치길래
한번
믿어볼까
했는데
너는
서해의 썰물 빠지듯
주방에서
줄행랑을 치더라.
그럴
줄은
미처
몰랐어
.
나는 도망간 탈영병 붙잡아 오듯
'널 불러다가 부엌일을 다시 시킬까????'
하고 생각도 했었지만
너도 잘 알고 있지?!
엄마는 절대 '강요'라는 걸
하지 않는 사람이잖아
아니. 아니지.
엄마가 강요한다고 해도
눈 하나 끔뻑하지 않을 사람이
바로 '너'라고
하는 게 맞겠다.
어쨌든 너는 주방일 몇 번만에
뒤로 나가떨어져서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놀고 있더구나.
엄마가 요새 갑자기 바빠진 거 너도 알지?!
그리고 밥을 20년 넘게 한다고 해도
엄마 손이 굼뜬 것.
역시 알고 있지?!
마음만 바쁘던 나는 결국 못 참고
놀고 있던 너를 불렀지.
"엄마 바쁘니까 삶은
계란
좀 살살 까렴"
그렇게 부탁하고
엄마는
할 일을 했어.
삶은
계란
세 개쯤이야 뭐.
그건 누구라도 너끈히 깔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근데 엄마가 반찬
만들다가 살짝 고개 돌렸을 때
희한한 광경을 봤어.
너는 계란 까는데도 도구를 필요로 하더구나.
갑자기 밥숟가락을 꺼내서
계란 껍데기를 벗기더라.
나 정말 깜짝 놀랐어.
숟가락에 비치는 너의 얼굴, 계란 까러 태어난 사람 같은 비장미가 흘러.
엄마
평생에
숟가락으로 계란 껍데기 까는 사람에 대해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거든.
네가 처음이야.
너는 정말 거침이 없더구나.
불도저처럼 숟가락으로
계란 껍데기를 밀어붙이는데
놀랍더라. 신기했어.
그래서 속으로 그랬지.
'어머, 나도 다음부터는 편하게 숟가락으로
껍데기를 까야겠다. 우리 딸이 참 현명하네.'
너는 1분 30초 만에
계란 껍데기 세 개를 올킬하고
소파에 가서 도로 드러눕더구나.
엄마가 요새 노안이 왔잖니?
계란 껍데기 잘 깠으리라 그냥 믿었지.
일일이 확인은 안 했어.
우리 사이에 치사하게
그런 게 왜 필요하겠어?
샐러드에 넣으려고 계란을 손에 잡는 순간
뭔가
느낌이
이상한 거야.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나, 비명 질렀잖아.
이렇게 누덕누덕 누더기가 된 삶은 계란은
평생
처음
봤어.
계란한테 미안한 마음까지 들더구나.
<패잔병 삶은 계란 모음ㅜㅜ>
계란이 너무 마이 마이 아파 ㅜㅜ
숟가락한테 된통 혼난 계란 1
숟가락에게 몰매 맞은 계란 2
초토화. 실신 상태 계란 1.2.3
거침없는 딸아,
간간이
브레이크 좀 밟으면서
'거침 좀 있어 주면 안 되겠니?'
천천히 해도 되고
살살해도 된단다.
예쁘게 하면 더 좋지.
전우익 선생님이 쓰신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민겨>에
이런 말이 있다.
"삶이란 그 무엇엔가 그 누구에겐가
정성을 쏟는 일이라고."
그리고 신영복 선생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지.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곧 우리들의 심신의 일부분을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누어 묻는 과정"
이라고 말이야.
우리가 까는 계란 한 알,
서로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에도
정성을 쏟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의 정성을 계란 속에도
서로의
가슴속에도
나누어 묻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나날들이 모이다 보면
어느덧 우리에게도 믿음이 생기겠지.
우리는 제대로 된 방향으로 걷는 중이라고
잘 살아내 보려고 애쓰는 중인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거야.
'계란 그까짓 것, 대충 까면 뭐 어때?'
물을 수도 있겠다.
그래, 아직 어린 너는 그런 생각할 수 있지.
근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또 다르게 생각해 보기도 하는 게 인생이란다.
그러니 네 맘대로 계란 껍데기를 까다가
어느 날 문득 잘 까고 싶은 생각이 들면
'어라? 내가 왜 이러지? 어제의 나랑 다른데??'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정성을 들여 보기도 했으면 좋겠어.
모든 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서 할 때
의미도, 힘도 생기는 법이니까.
아참. 근데 말이야. 계란
맛은 참 좋더구나.
물론 잘 삶은 내 덕일 거야.
그러나 한바탕 진한 웃음을 안겨준 건
너였다.
네 덕분이었어.
웃으며 또 하루가 이렇게 가는구나.
사랑하는 내 딸아.
keyword
정성
계란
딸
Brunch Book
딸아, 삶의 가장자리 끝으로 가자
07
딸아, 당면 대파 계란탕 부침이 뭐니?
08
모두가 싫어하는 깍두기 맛 호박전
09
거침없는 딸의 패잔병 삶은 계란 모음
10
딸기와 도넛을 무차별 공격하는 그녀
11
누가 그 우산을 공중에 매달았을까?
딸아, 삶의 가장자리 끝으로 가자
리하LeeHa
brunch book
전체 목차 보기 (총 15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