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시험공부 안 하고 놀다가 '이제 공부 좀 해볼까?' 하는데 갑자기 정전되는 때가 있었거든요. 30년 전에는 전력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온 동네의 전기가 일시에 꺼지기도 했어요. 그럼 마음이 급해지는 거예요. 전깃불이 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정신없이 놀았던 스스로를 탓하게 돼요. '불은 왜 꺼지고 난리야?' 원망하고 투덜대고 그러다가 결국 무리수를 두죠.
"나, 촛불이라도 켜고 공부할래."
엄마한테 잔소리 들어가며 촛불 하나를 차지해요. 그 촛불 아래에서 촛농 떨궈가며 공부했을까요? 아니죠. 책상 위의 눌어붙은 촛농을 자로 살살 긁어가며 또 놀았어요.
'곧 전깃불이 들어오는 건 당연하지 않겠어? 그럼 그때 가서 공부하면 되지....' 하고 생각했던 그날. 새벽까지 정전은 계속되었고 저는 촛농 만지작대다가 잠이 들었고 뒷날 시험은 못 봤고 결국 엄마한테 혼만 났죠.
정전이 되어버리면 내 마음대로 전깃불을 켤 수 없어요. '당연하다고 여기는 상황들'이 '당연하지 않은 상황'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걸 알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져요.
예를 들면 건강이 되겠네요. 지금보다 젊을 때에는 나이 들면 근육통이 올 수도 있다는 걸 전혀 몰랐어요. 어느 때부터인가 팔, 어깨, 등이 다 아픈 거예요. 저 스스로, 나이 들어도 건강한 건 '당연하다'라고 여기느라 노력이라는 걸 안 했어요. '당연하게 되는 일은 없다'라는 생각을 평소에 조금이라도 했다면 젊어서부터 '건강을 챙기는 삶'을 살았을 거예요. 많이 후회되죠.
얼마 전부터 눈을 깜빡이기가 여의치 않았어요. 간지럽고 따갑고 충혈이 되고 빡빡하게 느껴졌어요. '몸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데 설마 이 와중에 눈까지 말썽이겠어?' '눈은 괜찮을 거야.'라고 당연히 믿었는데 시시때때로 덧나서 아픕니다. 블로그를 하려면 모니터도 쳐다보고 휴대폰도 들여다봐야 하는데 눈이 아프니 보통 불편한 게 아니더라고요. 저는 평상시에 휴대폰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요. 요새 사용량이 증가하면서 정말 눈이 빠지는 것처럼 피로하더군요.
두달 전쯤 간 서울의 한 안과에서는 제 눈을 보더니 염증이 생겼다며 3분간 적외선 치료 후 항생제 복용약과 안약을 처방해 주었어요. 3일간 먹고 눈에 넣고 했는데도 상태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하는 수없이 집 근처의 안과에 또 갔습니다.
간호사 선생님이 제 눈을 보더니,
'안약 어떤 거 넣으셨어요?' 묻습니다.
주머니에 넣고 간 분홍색 안약을 보여줬어요.
"이거, 하나 넣으셨어요?"
속으로 생각했죠. 그럼 안약을 하나만 넣지, 두 개 세 개 넣을까요????
"네. 왜요?"
"아니, 두 개 넣지 않고요?"
"어머머, 두 개씩 넣기도 해요??"
순간 서울에서 갔던 안과가 막 의심되는 거예요.
'눈 상태를 제대로 진단한 거 맞아? 그러니 안 나았던 거 아닐까?'
환자가 많아서 40분 넘게 대기하다가 의사 선생님을 만났는데요. 알레르기 증상이 심하다고 항생제가 아니라 소염제를 써야 한다고 하더군요. 원래 하루 두 번 넣는 안약인데 상태가 너무 심하니 네 번씩 넣어야 한다고 해요. 안약 두 개를 처방해 줄 테니 며칠 후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먹는 약도 적외선 치료도 없더군요.
안약 두 개를 차례차례 넣어서 눈 상태가 조금 나아졌지만 집중해서 뭔가를 들여다본 날은 특히 더 불편해요. 눈이 안 아플 때는 온몸 쑤시고 아픈 게 크게 느껴졌거든요. 근데 막상 눈이 아프니까 몸 아픈 건 뒷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눈이 차지하는 부분이 그렇게 클 줄 몰랐죠. 일단 보고, 읽고, 쓰고, 걷고, 만들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마트 가고.... 그 모든 일에 '눈 건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걸 실감했어요. 뭐가 보여야 뭐든 할 수 있는 거잖아요.
한쪽 눈을 번갈아 감아 가면서 무언가를 하자니 모든 일처리가 그렇게 어눌할 수가 없더군요. 두 쪽 눈 다 뜨고 생활할 수 있었던 건 '당연한 일'이 아니었던 거예요.
언제든 눈이 아플 수도 있고 잠깐 동안 안 보일 수도 있지만 평생토록 안 보이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했습니다. '당연한 일'이라는 건 세상에 없는데 말이죠.
저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오랜 시간 살아왔어요. 아니, 때론 부족한 거 아닌가 의심하며 뭐든 좀 더 가져야만 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시간들도 많았어요. '내 나이에 이 정도쯤은 갖추고 살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 '요즘 이런 거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이건 상식 아니야?' 매 연령 대마다 저는 제 스스로에게 '당연한 권리나 의무'를 부과해 주며 생활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당연하다'라고 여겨버리면 실수가 잦아지게 되고요. 감사함을 모르게 되고 때론 교만하게 행동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살면서 '당연하다'라고 여기는 숱한 순간들이 얼마나 기적 같은 순간들이었는지 되돌아보게 돼요.
우리를 낳아주고 지켜주던 부모님이 있고 형제자매가 있고 성장해서 어른이 되고, 때론 배우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내가 낳은 아이를 키워 나가는 일. 그러면서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이 모든 과정 중에 '당연하고 마땅히 그러해야 할 일'이라는 건 하나도 없더군요.
우리가 이렇게 살게 되기까지 서로가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했을 테고 운도 따라 주었을 거예요. 나 자신이 잘나서 어떤 부모를 만나고, 배우자를 만나고, 아이를 낳고 건강과 능력이 따라 준 게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됩니다.제가 가진 것을,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마음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해요. 모든 순간들을 당연하게 여겨 버리면 삶이 권태롭게 느껴져요. 어떤 노력도 가치 없고 필요 없다고 여기게 되는 것 같아요.
가족이나 타인이 제게 베푼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 버리면 제 자신에게서 '예의'라는 단어가 실종돼요. '예의와 경우'가 사라진 자리에 '교만과 오만'이 들어서 버리죠. 시시때때로 잘난 것도 없으면서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고일어납니다. 스스로를 날마다 다잡지 않으면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당연하다'라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게 돼요. 그러면 세상 모든 것들이 밋밋해져 버려요.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인지.... 이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모든 것들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음에도 운 좋게 내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그러면 오늘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보려고 두리번거리게 돼요. 저를 키우는 일에 골몰하게 돼요. 더 좋은 읽을거리, 생각거리를 찾아보게 되고 저에게 해로운 일들, 제 감정을 괴롭히는 일들과는 거리를 두게 되지요.
그 옛날 정전된 상태에서 금방 불이 들어오겠지 하고 당연하게 믿어버렸던 순간의 기억들을 더듬거려 봅니다.
제 마음속에서 '감정의 정전사태' '감사함의 정전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려고 해요. 오늘 눈 뜨고 맞이하는 이 아침도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감사한 태도로 살아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