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언니, 오빠나 친구들이 모두 짜장면을 먹어도 나는 끝까지 짬뽕을 고집했다. 내겐 주문의 편의성을 생각해서 메뉴를 통일하라는 말이 먹히지 않았다. 안 먹으면 안 먹었지 짬뽕 대신 짜장면을 고르긴 싫었다.
아이들이 입술에 검은 짜장을 묻힐 때 나는 맵고 시뻘건 국물 덕에 부풀어 오른 입술을 자랑했다. 특히나 매운 짬뽕을 만난 어느 날은 혀가 얼얼해져서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지만 중독성 강한 맛이 좋았던 나는 그런 고통쯤은 감당할 수 있었다. 나는 그 후에도 어김없이 짬뽕을 시켰고 어쩌다 화난 입속은 얼음조각을 물어가며 달래기도 했다. 나는 일편단심 짬뽕파였다.
다른 이의 그릇 속에서 마지못해 한 젓가락 집어먹은 짜장면의 맛은 묘했다. 달짝지근함이 입안에서 감도는 게 영 이상했다. 한 끼 식사 대용으로 택한 짜장면에서 단 맛이 나다니. 간식도 아닌 식사, 배를 채울 끼니에서 나는 '느끼한 단 맛'은 좀처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나'라는 사람의 식성이 맵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모르던 때였다. 애꿎은 짜장면만 '희한한 음식'이라고 몰아세웠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중국집도 많이 갔고, 배달도 시켜 먹어 보았지만 내 몫의 짜장면을 마주한 적은 진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짜장면의 맛을 잘 모르는 나는 한 평생 탕수육의 짝꿍은 짬뽕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탕수육의 달콤함과 짬뽕의 매콤한 콜라보가 진리이지, 어찌 달달한 것들끼리의 모둠인 탕수육과 짜장면이 진리일 수 있겠는가?!
극강 비주얼, 짬뽕. 맛있음.
나의 이런 식성과 정반대의 사람은 남편인데 중국집에 가서 짬뽕을 시키는 걸 본 적이 없다. 늘 짜장면이다. 각자 한 그릇씩의 짬뽕과 짜장면을 시키면, 남편은 종업원에게 빈 그릇 두 개를 부탁한다. 나한테 짜장면을 덜어주려는 의도다.
그러면 나도 하는 수없이 내 몫의 짬뽕을 좀 덜어줘야 한다. 한 그릇의 짬뽕을 원샷 원킬하는 '완전한 짬뽕, 완뽕'을 즐길 수가 없다. 문짝의 아귀가 잘 맞지 않아 삐뚜름한 것처럼 '완뽕'에 도달하지 못하는 짬뽕 한 그릇은, 사실 한 그릇이 아닌 거다.
별로 내키지도 않는 짜장면 한 젓가락을 먹고자 내 몫의 피 같은 짬뽕을 내어주고 싶지 않은데 남편은 수십 년 동안 꼭 자기가 주문한 것을 맛 보라며 내게 조금씩 나눠 주고 있다. 그렇게 한두 젓가락 짜장면을 먹다 보니 서서히 짜장면의 맛에 물들게 되었나 보다.
맛없는 짜장면과 맛있는 짜장면을 구분할 줄 아는 미각을 갖추게 된 것이다. 예전엔 그저 느끼하며 달짝지근하게만 느꼈던 짜장면이 꽤 괜찮게 여겨질 때도 있다. 짜장면을 잘 만드는 중국집일수록 그런 느낌을 갖게 한다.
어제, 남편과 함께 외출했다가 낯선 동네에서 짜장면과 짬뽕을 한 그릇씩 사 먹게 되었다.
'어머나, 짜장면이 맛있구나.'
50 평생 짬뽕만을 고집해 온 내 입맛이 변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남편이 한 젓가락씩 내어주던 짜장면 맛에 완벽하게 길들여졌던지. 다음에도 그곳에 갈 일이 있다면 짜장면을 한 번 더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그렇다고 짬뽕을 시키지 않을 수는 없다. 남편에게 짜장면 곱빼기를 시켜서 두 접시 정도는 내 몫으로 남겨 달라고 해야겠다.
'느끼한 달짝지근'도 받아들이고 나름 즐길 줄 알게 된 '나'. 평생 고집하던 식성도 바뀌는 마당에 무엇을 바꾸지 못하겠는가?
좋은 것이 있으면 성큼 나서서 해보기도 하고, 남들이 맛있다고 하는 건 흔쾌히 먹어 보기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살아야겠다. 어쩌면 못 간다 내빼던 곳도 가게 될 것이며, 하기 싫다고 도리질 치던 수많은 일들 또한 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변화무쌍할 수 있는 나의 중년 이후의 삶을 칼로 딱 잘라 놓듯 '이것 저것 다 못한다'로 단정짓기는 싫다. 나는 내 삶이 밋밋하고 단조롭기 보다는 출렁출렁 움직이며 참다운 재미를 찾아자연스럽게 흘러갔으면 좋겠다.
50년 만에 짜장면이 슬슬 좋아지고 있다. 다음엔 싫었던 그 무엇이 또 좋아지려나? 소소한 기대를 하게 만드는 중년 이후의 삶, 변하는 식성도 내겐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