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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Oct 23. 2019

엄마가 남긴 '칼자국'

모두가 다르게 읽는다. 그게 문학이다.


9년 전쯤 김애란 작가님의 책 <두근두근 내 인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던 이유는 스르륵 잠들기 위해서였어요. 당시 저는 새벽 2-3시가 되도록 잠을 못 이루는 날들이 많았거든요. 누워서 책을 읽으면 금방 잠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따라 한 거죠.


몇 장 읽다가 잠들 줄 알았는데요. 아마도 그날 밤을 꼴딱 새웠던 것 같아요. 책을 읽다가 하도 많이 울어서 크리넥스 반 통쯤은 쓰지 않았나 싶네요.


그러고 나서 친구들을 만났을 때 <두근두근 내 인생> 이야기를 했는데 친구 중 하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재미도 없었다는 겁니다.


같은 작품도 읽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느끼는 점이 다를 수 있구나. 약간 충격이기도 했지만 사람은 감동하는 순간과 방식이 외모만큼이나 제각각일 수 있으니까 하고 넘어갔습니다.


그 뒤에도 후배에게 <구덩이>라는 청소년 소설을 추천했다가 '언니는 뭐 이런 책을 재미있다고 하냐??'라는 핀잔을 들었어요.


누군가에게 어떤 책은 눈물이고 감동이고 재미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루함이고 재미없음이고 무감동일 수 있다는 걸 알았지요.


그 후 어떤 책에 대해서 말할 때 꼭 '내 경우에는 재미있었는데 너는 아닐 수도 있어'라는 단서를 붙였어요.


'재미없는 책을 읽게 만든 네 탓이 진짜 크다.' 이런 식의 원망에서 피해 가고도 싶었지만 누군가의 소중한 시간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책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선택해야만 만족도가 높죠. 


블로그를 하면서는 책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는데요. 책을 읽다 보면 읽기 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는 나를 느끼는 순간이 있거든요. 저의 경우엔 그 순간이 좋아서 책을 읽습니다.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나의 과거를 더듬어 보고 현재를 살펴보고 미래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유추해 낼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문학은 가능하게 해요.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읽어도 괜찮고요. 대다수의 사람들과 다른 의견을 가지게 되어도 괜찮습니다. 읽고 깨닫게 된 나만의 느낌과 생각이 있다면, 그것들을 우리의 생활에 하나 둘 적용시켜 나갈 수 있다면, 그래서 조금씩 성장해 나갈 수 있다면 문학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은 우리에게 문학을 만나기 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남겨 놓습니다. 알게 모르게 반드시 자국이 남아 있게 됩니다. 아주 아주 희미한 자국일지라도 말이지요. 






김애란 작가님의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알고 있던 단어가 지금 이 작가가 쓰고 있는 단어와 같은 것인가 싶을 정도로 낯설게 보일 때가 있어요. 익숙하지 않다 보니 단어도 문장도 펄떡펄떡 살아 튀어 오르는 것처럼 다가옵니다.


작가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문체가 있어서 그것으로 자신을 오롯이 드러내기도 하는데요. 문체라는 건 문장의 개성적 특색을 말하죠.


사람들이 문장 몇 개만 보고도 작품을 쓴 작가를 알아맞힐 때가 있으니, 작가의 문체란 곧 작가 자신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듯해요. 김애란 작가의 문체는 늘 신선하면서도 아릿하고 잦아들면서도 저며 드는 느낌을 줍니다.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건강하고 아름답지만 정장을 입고도 어묵을 우적우적 먹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음식을 우적우적 씹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촌부.


어머니는 칼 하나를 이십오 년 넘게 써 왔다. 얼추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이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 창자와 내 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 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칼자국> 7-8쪽



칼이라는 것을 늘 무섭거나 위험하거나 위협적인 도구로만 알아왔던 사람들에게 김애란 작가님은 '칼과 칼자국'에 담긴 '모성의 위대함'을 들려줍니다.


어머니의 칼질이 서린 재료들로 만든 음식을 먹으며 자라온 우리. 우리들 몸속의 '칼자국'을  떠올려 보는 건 어머니의 희생과 노고, 헌신과 사랑을 생생하게 환원해 내는 방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연한 칼자국이 우리들의 혈관을 이리저리 타고 돌면서 날마다 가만있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을 떠올리고 기억하게 만들어요.

 




<칼자국>은 '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소설의 첫 만남'은 청소년들을 위한 책으로 나왔는데요. 사실 김애란 작가님의 단편집 <침이 고인다> 중 한 편을 이렇게 청소년용 책으로 만든 겁니다.


이효석 문학상을 받은 <칼자국>을 마중물 삼아 <침이 고인다> 단편집 작품들과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도 함께 읽기를 바라는 출판사의 출간 의도를 알 것 같아요.




어머니는 새댁 때 산 칼을 25년째 써옵니다. 그 칼로 생계를 꾸려왔어요. 시골에서 칼국수와 콩국수를 만들어 팔면서 딸을 서울의 사립대로 보냅니다.


억척스럽게 살아온 어머니의 곁에는 자주 갈아서 종잇장처럼 얇아진 서슬 퍼런 칼이 있고요. 어머니는 그 칼로, 모든 짐승들의 어미가 새끼를 먹여 키워내듯 자식을 정성껏 먹입니다.



때론 거친 표현으로 심한 장난으로 딸을 대하지만 어머니의 진심은 한결같아요. 날카로운 칼에 손가락이 베이고 손톱이 떨어져 나가도 칼국수 만드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내 자식 입에 들어갈 양식 거리가, 반죽을 썰어대는 어머니의 칼질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요. 피나고 아픈 것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시골 한구석. 간판 새로 달 돈도 없어서 망해 나간 제과점 '맛나당' 이름으로 칼국수를 파는 어머니는 요리와 서빙과 계산과 청소를 혼자 도맡아 하느라 어린 딸의 투정 한번 들어줄 틈이 없습니다.


토라진 딸은 어디 가서 콱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때 마침 지옥에서 온 것 같은 사이즈가 '소'만 한 검둥개를 만나죠. 개는 딸을 보고 짖고 놀란 딸은 외마디 비명을 지릅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저 멀리서 들려온 딸의 외침을 기막히게 듣고 바람처럼 날아온 어머니의 손에는 예의 그 칼이 들려있습니다.  어머니는 그 칼 하나로 딸이 살아나갈 세상을 온전히 지켜 나갑니다.



심성은 착하지만 무능력한 아버지가 돈 사고를 치고 동네 목욕탕 때밀이 아줌마와 바람이 나도 어머니는 정성껏 반찬을 차려 밥을 해먹입니다.


그제야 딸은 깨닫죠. 자신 역시 한 번도 배곯아 본 경험이 없었음을요.


궁핍 혹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간 감당해 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


오랜 세월, 어머니는 뭘 재우고, 절이고, 저장하고, 크게 웃고, 또 가끔은 팔뚝의 때를 밀다 혼자 울었다.


 51쪽



그런 어머니가 간을 보며 칼국수를 끓이던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돌아가십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어머니의 죽음 앞에 앉아 있던 딸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칼국수 가게 안에 있는 방으로 가죠.



딸은 그 방에서 어머니와 목욕탕에 갔던 추억을 떠올리며 잠이 듭니다.


새벽녘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채 깨어난 딸은 어머니의 부엌에서 '모든 것이 괜찮다, 다 괜찮다.'라고 타이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어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생에 처음으로 굶었던 사흘. 어머니의 부재는 곧 삶의 허기임을 느낀 딸은 부엌에서 칼을 보게 됩니다.


그 칼로 사과를 깎아서 한 입 베어 물지요. 어머니의 칼자국을 먹고 자라난 딸은 이제 자신의 칼질로 음식을 해 먹으며 살아갈 겁니다.  


그렇게 딸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딛고 자신의 생을 스스로 챙깁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가며 또 어머니가 됩니다.


김애란 작가님의 '칼자국'을 읽으니 제 안에도 분명한 자국이 생겼습니다. 문학의 힘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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