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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Oct 29. 2019

반려동물한테 꼭 그랬어야 했니?

윤리적 학살이 무슨 말인가.


한때 사람들 머리 위로 비둘기 떼들이 후드득 날아가면 얼른 집에 가서 샤워해야 한다는 소문이 돌 때가 있었어요. 비둘기가 떨어뜨리는 각종 세균들로 인해 질병에 걸린다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저도 당시 위생, 청결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때라 거리에서 비둘기를 만난 날은 더 정성껏 박박 씻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옛날 올림픽 때나 각종 대회 때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비둘기들은 어느 때부터인가 질병 유발자, 환경 오염자, 비호감 새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길거리에 떨어진 모든 것들을 먹어대던 비둘기는 결국 '닭둘기'로 불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죠. 혹자는 대학 시절 선배가 끓여 준 삼계탕의 정체가 알고 보니 '비둘기'였다더라는 말로 듣는 사람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했었습니다.



신호 대기 중에, 혹은 버스 기다리는 중에 저 멀리에 있던 비둘기가 목을 움씰움씰하고 몸을 꿀룩꿀룩대며 제 쪽으로 다가오면 무섭습니다.


확 쫓아버리기에는 불쌍하고 그렇다고 제 발아래까지 와서 돌아다니는 건 두렵고요. 이런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제가 이중인격자는 아니겠지만 심경은 좀 복잡해집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이런 복잡다단한 심경을 요즘 스페인 마드리드에 사는 사람들도 느끼는 모양입니다. 그런 감정을 느끼게 만든 대상은 바로 '퀘이커 앵무'라고 하더군요.


마드리드 시내에 사는 퀘이커 앵무의 개체 수가 폭증을 해 버리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스페인 정부에서는 `윤리적으로 학살`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들은 말 중에 가장 이해가 안 되던 것이 바로 '윤리적'과 '학살'이라는 단어의 조합이었습니다.


'학살'이라는 것이 가혹하게 함부로 죽이는 것을 뜻하는데 그 단어 위에 '윤리적'이라는 말을 붙이면 덜 잔혹해지는 건가요? 아니면 도덕적 비난을 피해 갈 수 있다는 뜻인가요?


입에 쓴 약을 먹기 좋게 당분으로 씌워 놓은 것을 '당의정'이라고 하는데요. 당분 코팅이 벗겨져도 쓴 알약은 그대로 있습니다. 당분을 씌워놓았다고 설탕이 되는 게 아니죠. 그대로 약이에요.


'학살' 위에 씌운 '윤리적'이라는 포장지를 들춰내면 어쨌든 '퀘이커 앵무'를 죽이겠다는 말이잖아요. 그건 변치 않는 사실인 거죠.



퀘이커 앵무



이 퀘이커 앵무의 근원지가 바로 일반 가정집이었다는 것에서 사람들의 고민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2011년 법적으로 '소유 금지' 시키기 전까지 반려동물로써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퀘이커 앵무를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내다 버리게 됩니다.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은 퀘이커 앵무는 질긴 생명력과 왕성한 번식력으로 개체 수를 늘려 나가요. 퀘이커 앵무는 20여 년 가량 살고요. 매해 6-8개씩의 알을 낳습니다.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앵무새 한 마리가 최소 120마리의 새끼 앵무새를 낳고 죽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 사이 어떤 대책도 없이 지내다가 한계를 맞이하자 스페인 정부에서 내놓은 정책이 '윤리적 학살'입니다. 또한 알에 소독을 하여 새끼 앵무새의 부화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는 것이라고 합니다.



퀘이커 앵무



반려동물을 사랑했던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토록 매몰차게 길거리에 버릴 수는 없었을 텐데 말이죠. 또한 한없이 방치하다가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대책이라고 내놓지도 않았을 테고 말입니다.


반려동물을 유기하고 학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전해 들을 때면 늘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가진 개체로써 반려동물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 폐기할 수 있는 물질로써만 봤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계속 있는 한 버림받는 동물의 수는 현저히 늘어날 수밖에 없고요. 그로 인해 환경 파괴와 생태계 교란이라는 엄청난 대가도 치러야 할 것입니다.


반려동물은 '정말 사랑하고 아껴줄 사람에게만 분양'한다는 조건이 제도적으로 마련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랑받고 자란 반려동물은 항상 반짝거려요. 다른 집 반려동물 중에도 특히나 귀여워 보이는 동물들은 여지없이 온 가족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자라고 있더군요.


저는 동물을 무서워해서 반려동물 키울 만큼의 배포는 없지만요. 사랑받고 있는 반려동물을 지켜보는 건 좋아합니다. 제가 아끼는 지인이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데요. 그 강아지에게서는 사랑받은 티가 흘러넘칩니다.


책과 함께 매번 사진으로 등장하는 강아지 '라떼'를 볼 때마다 '행운견'이라는 생각이 들죠.


 



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서일까요? 눈에서도 털에서도, 온몸에서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세상 모든 생명은 이렇게 사랑받을 때 빛이 납니다.


사랑받는다는 건 천덕꾸러기로 전락되는 일이 절대 없을 거라는 것. 그러니 안심하고 함께 잘 살아 보자는 것. 아닐까요?


유기라든지 윤리적 학살이라든지 하는 그런 무서운 단어는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반려동물들이 주인들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잘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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