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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Dec 26. 2019

요알못도 만드는 감바스

아무나 해도 절대 망칠 수 없는 요리, 감바스.


2주 전 일요일 오후, 남편이 감바스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음식을 잘 못 먹고 있으니 본인이 뭔가 요리를 해보겠다고 나서더군요.


참고로 저희 남편은 최근에 압력솥 뚜껑 여는 법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 압력솥이 거의 10년 된 거거든요. 그러니까 10년간 압력솥 뚜껑을 본인의 의지로 열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거죠. 당연히 밥을 해 본 적도 요리를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오로지 라면과 짜파게티만 끓일 줄 아는, 요리를 알지 못하는 전형적인 요알못입니다.  


그런 남편이, 제가 몇 주째 새벽 독서 모임도 못 가고 골골대고 있으니 신경이 쓰였나 봅니다. 감바스 재료를 여기저기서 대충 꺼내더라고요.




최근에 남편이 코스트코에 갔다가 데리고 온 올리브 오일입니다. 저는 무슨 업소용 간장인 줄 알았어요. 3리터짜리라서 머그잔이 아기처럼 보입니다.


저 커다란 오일을 사 올 때부터 남편은 '감바스'를 정복해 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나 봐요. 감바스 재료에서 가장 중요한 올리브 오일입니다.



저희 집 구석에 잠자고 있던 스파게티 면입니다. 길이가 상상초월이에요. 옆에 있는 생수통은 500밀리짜리가 아니라 2리터짜리입니다. 2리터짜리 생수통의 두 배에 달하는 스파게티 면.  마구 부러뜨려서 삶아야 합니다.


한 번에 들어가는 깊은 냄비나 솥 같은 건. 저희 집에선 취급하지 않습니다. 저는 주방도구, 그릇에 전혀 관심이 없는 주부라서요.


스파게티 면은 삶아 놓았다가 감바스를 다 먹은 후 남은 오일에 넣으면 짝퉁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가 됩니다.



언제부터 저희 집에서 살고 있었는지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통후추도 꺼냈습니다. (남편은 유통기한에 상당히 민감한 편인데 모르고 넘어갔습니다)


페페로치노 홀(건고추)와 월계수 잎은 원래 없었는데 최근 남편이 사다 놨더군요. 감바스 재료로 이 둘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사실 월계수 잎의 역할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새우야말로 가장 중요한 감바스 재료입니다. 요리명이 새우 감바스이니까요. 


생마늘은 제가 편을 떠주었습니다. 새우도 제가 씻어줬습니다. 스파게티 면도 제가 삶아줬습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이 요리를 한다고 하고는 손 많이 가는 것들은 아픈 제가 다 한 것 같습니다. ㅜㅜ


그렇게 해 주고 나서 저는 누워서 쉬고 있었고요.  그 사이 남편이 이리저리 요리를 하며 사진도 엉성하지만 다 찍어 놓았더군요.



감바스 재료들이 올리브오일 속에 푹 잠겨 있습니다. 이걸 중간 불로 끓여야 한답니다. 올리브오일은 센 불로 하면 안 된다더군요. 남편은 그 사실을  센 불에 요리를 다 하고 난 직후에 떠올렸습니다.



새우를 넣고 나서 페페로치노 홀(건고추) 이외에 잘게 자른 레드페퍼 홀(가루를 낸 건고추)을 집어넣었더라고요. 남편은 요리가 지저분해진다고 싫어하는데요. 저는 매콤한 맛이 좀 나는 걸 좋아하거든요. 제 입맛에 맞춰 준 모양이에요.


바질(향신료. 가루)도 대충 뿌리고 나서 완성된 새우 감바스에 할라피뇨(고추 피클)를 곁들여서 가지고 왔습니다.



제가 속으로는 '뭐....맛이 나겠어????' 하고 좀 무시했거든요.

, 그런데 맛이 괜찮더라고요.

원래는 바게트에 곁들여 먹는데요, 저희는 냉동실에서 잠자고 있던 베이글과 먹었습니다. 스파게티 면도 섞어서 먹고요. 고추의 매운맛이 은은해서 느끼하거나 질리지는 않아요.


감바스 재료로 버섯이나 브로콜리, 야채 등등을 넣어야 했는데 남편은 대부분 생략하고 몇 가지만 넣었어요. 그래도 맛은 비슷하게 났습니다.


정통 감바스 요리가 귀찮다 하시는 분들은 올리브오일과 마늘, 새우, 매운 고추에 소금과 후추 약간만으로도 맛을 낼 수 있는 간단 감바스에 도전해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복잡하게 재료를 다 구비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건고추 그런거 귀찮으시면 청양고추 넣으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저희 남편이 여태 감바스를 세 번 만들어 주었는데요. 그때마다 맛의 차이가 크게 없는 것으로 봐서는 감바스는 소문대로 '아무나 막 해도 절대 망칠 수 없는 요리'인 듯 합니다.^^ 요알못 남편도 뚝딱뚝딱 만들어 내는 새우 감바스. 간단하게 먹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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