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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으로 받은 머리털

은퇴 부부의 동거일기

by 연글연글



한밤중, 꿈속에 시아버님이 나타나셨다.

한 손엔 집문서를, 다른 손엔 머리카락을 들고 물으셨다.

"유산으로 무얼 받을 테냐!"

​우리는 주저 없이
"머리털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그래서 남편의 머리는, 듬성듬성하거나 희끗희끗한 또래들에 비해 숱도 많고 염색도 하지 않는다.

​가끔 아이들은 주름진 피부는 보지 않고
까만 머리색만 보고는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겁나(?) 좋아한다.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를 정리하다 마주하는
침구 위에 널브러진 짧은 털,
소파 등받이 위에 고요히 쌓여 있는 털,
세면대며 러그 위에도 야무지게 자리 잡고 있는 털.

바로, 남편의 머리털이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 귀한 유산, 그냥 포기할 걸 그랬나...

아니면 ​대머리를 택하고 집을 받을 걸 그랬나 '
(정말로 믿으시려나)

​시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신 후,
시아버님은 재혼하셨다.

​우리 부부와 형제들은 아버님의 라이프 스타일을 존중했다.
'당신의 인생이니, 당신의 뜻대로.'

​재혼 후 아버님은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오직 새 가정과의 삶에 집중하셨다.
내가 주위에서 본 어떤 노년보다도 즐겁고 여유로운 여생을 보내셨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모든 부동산과 통장까지,
십 원 하나 남김없이 새 부인에게 넘기셨다.
어차피 우리 것이 아니었으니 아버님의 뜻대로다.

​결혼하고 시댁 도움 없이 열심히 살아왔다.
우리의 아이들도 그런 우리를 보며 스스로 살아가는 자세를 배웠다.
땀 흘려 얻은 것만이 진짜 우리 것이다.
그렇게 쌓아온 것들이 크지는 않아도 단단한 우리 것이다.

​물론
기대하지 않았다고 서운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래서 내 맘대로 유산을 챙겼다.
남편의 머리털로.

​암튼, 그렇게 챙겨 받은 유산 덕분에
요즘 우리 집엔 머리털이 넘쳐난다.

​가끔 남편의 머리털을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귀한 유산이니... 내가 참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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