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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컬레이터 복수전

은퇴 부부의 동거일기

by 연글연글



물론 연애할 땐 달랐다.
얼마나 세심하게 챙겨주는지
정말 저 하늘에 별도 따 달랄 뻔했다.

​결혼하고 딱 7년 만에
권태기인지, 콩깍지가 벗겨진 건지
남편이 슬슬 싫증 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별것 아닌 일들도 하나하나 눈에 거슬렸다.
그전에는 몰랐던 것들이 새삼스럽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딸 둘 낳고
행복하기도 하고
도를 닦기도 하면서
여기까지 함께 왔다.


은퇴 후 늘 붙어 지내다 보니
감정을 곱게 다스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야말로 체험 삶의 현장이다.

​오늘도 집 앞 슈퍼에 장을 보러 나가면서
또 한 번의 작은 복수전이 펼쳐졌다.

​남편은 요즘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잠시 한 눈을 팔면, 신호가 바뀌자마자 저벅저벅 혼자 먼저 건넌다.

뒤늦게 알아차린 내가 따라가면, 저만큼 앞서가는 게 꽤나 좋은가 보다.

​"건너자!" 한마디가 어려운 건지.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면
내가 또 너무 속상하지.
그래서 때를 기다린다.

​장을 보고 나오면 남편이 늘 헷갈리는 지점이 있다.
에스컬레이터 방향이 상행과 하행이 교차되는 그곳.
남편은 늘 반대쪽으로 돌아간다.

내가 할 일은?
그냥 재빨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된다.

​잠시 후,
뒤에서 뚜벅뚜벅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나도 "내려가자!" 그 말이, 그렇게나 어렵더라.

​후후 오늘은, 크게 손해 보지 않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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