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품격? 그건 젊을 때부터
3년 전쯤이었다.
작은 딸을 만나기 위해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바쁘게 자리를 찾아갔더니, 웬 할머니가 떡하니 앉아계신다.
좌석표를 다시 확인하고는
"저... 이 번호는 제 자린데요..."
좌석 번호가 찍힌 표를 보여주며 설명을 해도, 일초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당신 자리가 맞단다.
"표 좀 보여주세요. 확인해 드릴게요 "
표를 깊숙이 넣어놔서 꺼내기 어렵단다.
노인으로 인해 이렇게 황당한 일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공원 산책길에서, 바로 내 앞의 발 밑에다 가래침을 뱉어내는 할아버지들에 경악했었는데
이 할머니는 그보다 한 숟가락 더 얹으신다.
하는 수 없이 승무원을 불렀고, 그의 도움으로 할머니는 통로를 사이에 둔 옆 좌석으로 옮겨갔는데
그 사이에 자리에 있던 슬리퍼며 어메니티를 몽땅 가져갔다.
텅 비어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새로 옮긴 좌석에 있는 슬리퍼와 어메니티를 달라 했더니 없단다.
비어 있었단다.
'엥? 이건 또 무슨 눈 가리고 아웅이지?'
내가 기막혀하고 있으니, 할머니 뒤에 앉은 젊은 청년이 나에게 나지막이 일러준다.
"저 가방 뒷 주머니에 넣었어요"
청년이 보기에도 할머니의 행동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내가 남의 보따리까지 뒤집을 수는 없으니 이번에도 역시 승무원을 불러 새로 슬리퍼와 어메니티를 받았다.
이제 소동은 끝났으니 신경 끄자...... 했는데,
한번 거슬리기 시작한 할머니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손짓으로 승무원을 부르더니 귀마개를 더 달란다. 여분으로 하나를 받자, 아주 넉넉히 더 달라고 한다.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승무원이
"다른 승객 분들도 필요할 수 있으니 나중에 남게 되면 더 드릴게요."
상냥하게 말했지만, 할머니는 쌩한 표정으로 대꾸도 안 한다.
승무원이 돌아가자마자, 반대편에 지나가는 승무원을 부르더니 또 귀마개를 달라고 한다.
상황을 모르는 승무원이 두 개를 더 가져다주었고, 할머니는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받아서는 보따리에 챙겨 넣었다.
비행기 안에서 주는 귀마개가 뭐 그리 고급을 주겠는가, 다이*에서 천 원이면 8개씩 들어있는 허다한 수준일 텐데.
자, 이쯤에서 끝이 나면 내가 시작도 안 했겠지.
기내식 시간이 되자, 승무원을 또 부른다.
자기는 건강이 뭐 어쩌고 저쩌고...... 암튼, 결론은 밥을 제일 먼저 달라는 거다.
히야! 할머니 대단하시네!
그렇게 식사도 먼저 받아 드시고는 잠이 드셨다.
긴 시간을 날아온 비행기가 드디어 호주에 도착했다.
착륙 준비를 할 즈음에, 화장실 앞에 줄 서있던 승객들에게 자리로 돌아가 안전벨트를 착용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승객들이 모두 자리로 돌아가자, 화장실 앞의 틈만 노리던 할머니가 역시나 벌떡 일어선다.
위험하니 앉으시라는 승무원의 제지도 뿌리치고는 지금 꼭 화장실을 가야 한다고 막무가내다.
결국 승무원도 포기한 듯 돌아서 버렸다.
줄을 서지 않고 화장실에 다녀와 신이 난 할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화장품을 꺼내 열심히 두드리고는 전화기를 꺼내 누군가에게 픽업 확인을 하는 듯했다.
이쯤 되니, 저리도 자신밖에 모르는 할머니의 주변 사람이나 가족들이 왜 그리도 안쓰럽게 생각되는지...... 그건 나의 오지랖일까.
예전에는, 철없고 품위 없던 젊은이들도 나이가 들면 모두 점잖고 여유 있는 백발의 어른이 되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내가 나이 들어보니, 나이가 배려와 여유를 채워주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애초에 품위 있고 배려있는 젊은이만이, 그런 노인이 되는 거였다.
나처럼 심각한 거 싫어하고 참을성이 부족했던 젊은이는 품위도 못 챙기고 통통거리는 할머니가 된 것처럼, 저 할머니는 오로지 자기 외에 다른 것은 보지 않던 젊은이가 그대로 할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 한국에서 호주로 날아오는 내내,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당신이 짱이었습니다'.
나도 수시로 누군가의 시선 속에 '그 할머니'가 될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남의 자리 먼저 차지하고, 가치 없는 욕심에 집착하며, 기다리는 시간은 일도 참지 못하여서,
세상을 내 중심으로만 돌리는 모습일까?
아닐 것이다.
조금은 웃고,
조금은 미안해하고,
조금은 참을 줄 아는,
손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할머니가 되고 싶다.
그 할머니를 보면서, 조용히 다짐해 본다.
나이를 먹는 건 피할 수 없지만,
어떤 노인이 될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