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부부의 동거일기
작년까지만 해도 남편은 여름이 되면 캐나다에 살고 있는 동생집을 찾아가 여름을 지내고 왔다.
자연에 대한 감성이 나보다 훨씬 깊은 남편은, 캐나다의 대자연의 품을 많이 동경해 왔다.
이 부분에서 우리 부부의 차이가 또 하나 드러난다.
남편은 여행을 가면 자연과 가까운 곳, 풍경 중심의 관광이나 레저 활동에 흥미를 보이는 편이다.
반면 나는 숙소도 시티 뷰, 여행도 도심 중심의 관광지를 선호하는 쪽이다.
캐나다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여름에만 캠핑장 운영을 하는 동생을 돕기도 할 겸,
남편은 은퇴 후 한여름 내내 자연의 품에서 맘껏 지내고 올 계획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동안 바쁜 일상에 미뤄두었던 '자연 속에서의 쉼'을 이제야 실현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컸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19의 여파로, 그 모든 계획을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해외 출입이 가능해지자, 남편은 곧바로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같은 시기에 마침 손녀도 학교 방학을 맞아 엄마와 함께 한 달간 미국으로 떠났다.
덕분에 나는, 지금껏 살아오며 처음으로'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을 하자마자 결혼을 한 나는, 한 번도 혼자서 지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TV속 혼자 사는 연예인들의 일상을 보면서, 늘 막연한 부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과연 나도 혼자만의 그 시간을 잘 누릴 수 있을지, 아니면 막상 버겁게 느끼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침내 그 상상이 현실이 되는 기회가 내게도 찾아온 것이 마냥 설레었다.
남편이 출국하던 날, 공항버스에 태워 손 흔들어 배웅하고 나는 곧장 집 앞 쇼핑몰로 향했다.
설레는 맘으로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올리브 영.
그곳에서 핫 핑크 몸통에 연두색 칫솔모가 달린, 보는 순간 눈이 '띠로 롱' 뜨이는 칫솔 하나를 골랐다.
이어서 옆건물에 있는 두부집에 들러 콩국물을 한통을 사고, 슈퍼마켓에 들러 생면도 한 봉지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 텅 빈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제일 먼저 욕실 청소부터 시작했다.
거울의 얼룩을 문질러 닦아내고 변기도 깨끗이 청소한 다음, 새로 산 예쁜 핑크 칫솔을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이제 누가 봐도 여자 혼자 사는 예쁜 욕실처럼 보인다.
다음 순서는 남편의 침구를 벗겨 세탁기에 돌리는 일이었다.
온 집안을 말끔히 정리해 두고, 기분 좋게
국수를 삶아 콩국물에 말아 저녁을 해결했다.
쾌적한 공간에서 배도 채우고, 주방까지 싹 치워 놓으니 괜히 마음이 뿌듯해졌다.
그렇게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시작하는 첫 단추를 기분 좋게 꿰었다.
더 이상 벌려 놓는 사람도 없고, 리모컨을 두고 티격태격할 일도 없다.
늘 옆에서 나를 흔들던 기침 소리, 코 푸는 소리, 쓱쓱 발 끄는 소리까지 모두 음소거 상태다.
손녀가 놀러 오면 이리저리 바쁘게 끌려다니던 살림살이들도 이제는 모두 '제자리 얼음'이다.
나는 그 조용하고 단정함 속에서 혼자만의 여유를 한껏 누렸다. 시간을 즐기며 티브이도 마음껏 봤다.
‘전현무의 나 혼자 산다’가 전혀 부럽지 않은,
진짜 나만의 시간을 한 달 동안 마음껏 누려볼 참이다.
밤이 무서울까 살짝 걱정되긴 했지만, 잠이 들고 나면 무섭지 않겠지 싶어 졸음이 꽉 찰 때까지 티브이 앞을 지켰다.
첫날밤(?)을 무사히 넘기고 찬란한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 정돈해 둔 그대로의 흐트러짐 없는 공간을 다시 마주하며 아침을 즐겼다.
'음... 나혼산의 출연자들이 이런 기분이겠구나' 하며
혼자 흐뭇해했다.
하루, 이틀, 얼마간은 꽤 만족스러웠다.
나만의 공간, 나만을 위한 시간이.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집은 마치 숨결 없는 정물화처럼 느껴졌고 그 그림 안에서 시간은 멈춰 있는 것만 같았다.
한 달을 채워가니 속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 혼자 있는 시간도 좋았지만,
이제 누군가와 함께 있는 시간도 괜찮겠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혼자만의 시간도,
혼자의 시간을 실컷 누려봐야 함께 있음의 귀찮음(?)조차 은근 그리워지나 보다.
게다가 붙어 있을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으르렁 대회'를 열던 남편이, 바다 건너에서 보내오는 아침 카톡은 어찌나 다정한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평생 나를 앞에 두고는 칭찬 한마디도 인색하던 사람이, 카톡 속에서는 칭찬과 걱정이 넘쳐흘렀다.
그래, 오래된 부부도 가끔은 띄엄띄엄 봐야 더 예쁘다.
조금은 번잡한 일상, 익숙한 생활의 소리들, 그리고 서로의 잔소리까지도.
이제 다시 '우리'의 시간이 시작되겠지만,
결국 사람은 누구와 함께 나누고, 부딪히고, 웃고, 다투며 살아가야 비로소 '살아 있다'는 실감을 하게 되는 존재인가 보다.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배운 것들을, 이제는 함께 있을 때 더 잘 살아내기 위해 써보려 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언젠가 또 숨이 턱에 차도록 '나 혼자 산다' 시간이 그리워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요함과 소란함 사이, 홀로와 함께 사이를 오가며 비로소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삶의 속도를 배워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혼자만의 시간은 분명 소중했고 나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지만,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절실하게 다가온 건
관계의 소중함, 사람의 온기였다.
이처럼 인생은, 한쪽으로 치우침 없는 균형을 찾아가는 여정이라 생각된다.
오늘도 나는,
그 배움의 길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