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담자: 정여원
[SESSION 02. 사회불안증]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상당히 재미있게 보았는데, 주인공 ‘동백’ 의 대사 중 제 인생의 가장 큰 서러움을 단 한 줄로 정리한 말이 있습니다.
- 그냥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이 저를 이상하게 안 좋아하더라고요. 묘하게 그늘졌다나요.
세상 태평하게 사는 듯한 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려웠고, 늘 조바심 치는 제 속마음을 들킬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을 어려워 했습니다. 대화 중에는 혹시 내가 어색하게 웃고 있나 신경이 쓰인 나머지 입 꼬리가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것 같았고 심한 때에는 물컵을 들어 올리는 손 모양조차 의식 되어 덜덜 떨리곤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맞은 편 사람은 필시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라는 생각에 시달리다 마침내 혼자가 되는 시간이면 온 정신이 너덜너덜 할 정도로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되고 말았지요.
개인적인 친분이야 만나지 않으면 그만, 회사원이라는 신분 탓에 별 수 없이 회사에 출근은 해야 하니 사람들과 매일 어울리는 것이 곤욕이었습니다. 특히 괴로운 것은 ‘스몰토크’였는데 우르르 무리에 끼는 것이 아닌, 둘 셋 정도 소규모로 모여 사담이라도 하게 되면 제 머릿속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새하얗게 마비가 되곤 했습니다. 그나마도 혼자가 되는 시간에는 혹시 말 실수라도 하지 않았는지 이미 내뱉은 단어 하나하나를 다시 꺼내어 검열했고, 누군가의 기분이라도 상하게 한 것은 아닌지, 다음 만남에서라도 눈치를 살피기 일쑤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배려하는 태도는 오히려 대접을 받아야 마땅할 텐데 사람들은 오히려 저를 부담스러워 하는 듯했고 무리에서의 존재감은 희미해져 제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존심은 사정 없이 무너졌고 업무에 쏟아야 할 에너지는 남아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은 곤죽이 되곤 했지요.
머리에 문제라도 있지 싶어 신경정신과를 찾았습니다. 큰 결심이나 한 마냥 성큼, 들어섰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만 해도 신경정신과를 찾는다는 것이 그리 보편적인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그곳에서 ‘사회공포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사회불안장애’로 명칭이 바뀌었더군요.
사실 어린 시절부터 쭉 그래왔습니다. 교우 관계에 있어서는 안쓰러울 정도로 필사적이었지요. 또래 사이에서 첫째 가라면 서러울 제 특성은 ‘착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착한 친구’라는 가면은 심리적 약자로서 살아남기 위한 저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자 무기였습니다. 애초에 쓰자고 정한 적도 없는데 언제부터인가 제 정체성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5살 즈음, 친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여자 아이가 무심하게 떠내려 보낸 튜브를 건져 주려다 그만 수영장 물속에 꼬르륵 가라 앉아 죽을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홀연 수영장에 뛰어든 저를 보고 기가 질린 한 선생님이 왜 그랬냐고 다그쳐도 해감 전의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 뿐이었습니다. 친구가 되고 싶었으니까요. 튜브를 건져 주면, 저를 좋아해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목숨도 거는 판에 자존심 쯤이야 뭐. 부모님들이 찻잔을 달그락 거리며 수다를 떠는 사이, 그 집 딸인 6살짜리 또래 아이의 방으로 끌려가, 아마도 그 집 부모의 방식을 따른 듯한 ‘훈육’을 당하기도 했지요. 잘못했어, 안 했어? 라면서 다그쳐 묻는 동갑내기 여자아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앉아 눈물만 뚝뚝 떨구는 시간도 고스란히 견뎌낼 줄 알았습니다.
아니라고 말 못하는 아이, 누구도 귀찮게 하는 법 없는 얌전한 아이. 혹여 입이라도 떼면 내 본 모습이 들킬까 두려워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내리 옆자리 짝들과 단 한마디도 나누지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래도 고분고분 웃어주면 적어도, ‘야, 걔 되게 착해’라는 말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야, 걔 되게 착해.
- 그런데 되게 재미없어.
- 정여원, 너 언제부터 있었냐? 있는 줄도 몰랐다.
종종 듣곤 하는 조롱 섞인 평가가 심장을 후벼 파곤 했습니다. 거절의 표현은 극도로 자제했지만, 가끔 싫은 내색이라도 비칠 때면 거친 한숨이 돌아왔습니다.
- 하,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했던 이미지랑 완전 다르네.
이런 무시가 차츰 쌓여 1학기때의 절친했던 친구들은, 2학기 즈음엔 어느새 제 책상을 발로 쾅쾅 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 아침에 집 앞까지 안 데리러 왔냐, 빌려온다 하던 체육복은 어떻게 됐냐는 등 윽박지르는 정도가 시나브로 심해졌습니다.
- 여원아, 애들이 너 진짜 불쌍하대. 맨날 지은이 밑에서 눌려 사는 거, 힘들지?
- 여원아, 정민이랑 왜 노는 거야? 니 면상 된장찌개처럼 생겼다고 맨날 놀리는 애랑 놀고 싶어?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늘 사람 좋은 웃음으로 얼버무렸습니다. 그러면 다들 아무 얘기 하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착한 아이,쯤으로 끝나면 아예 나쁜 모양은 아니지 않나요. 끝내 꺼지지 않는 그 놈의 자존심에 이따금 불길이 이는 고통만 조금 더 참아내면 될 일이었습니다.
대학 때 어느 선배가 일침을 놓더군요.
- 너랑 대화하고 있으면, 벽을 보고 말하는 기분이야. 넌 무슨 인형이냐.
선배의 말이 화살처럼 날아와 정곡을 가격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제 말과 감정 사이에는 늘 괴리가 존재했습니다. 겉으로만 대화를 했지 그건 진짜 제가 아니었습니다. 정확한 지적에 오히려 기분이 나빠져, 그 선배와는 다시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제 스스로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하나 둘 단절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창 시절 얕게 나마 유지되던 친분들은, 사회인이 되는 순간 더이상 남아있지 않더군요.
다른 사람의 인정을 원하지만, 스스로를 용납하지도 못하는 제가 과연 그것을 받을 자격이나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늘 불안하고 외롭습니다. 혼자이고 싶지만 혼자여서 괴롭습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둥둥 떠있는 기분입니다.
- 내 안 깊은 곳의 생각과 마음은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저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지만 점점 더 가까워져 나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면 그래도 저 사람은 내 곁에 남아 있을 것인가?
모두가 저를 좋아해 주길 바랬지만, 모두가 저를 싫어하게 된 이 상황은 대체 무슨 아이러니일까요.
얼마 전 어느 단편 영화를 보았습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한 남녀가, 이런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
- 과거의 당신을 만난다면 무엇을 하고 싶어요?
- 나는 그 아이를 안아주고 싶어요.
저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품에 꼭 안아주기에 그 아이는 너무 볼품없고, 못났고, 붙임성조차 없습니다. 작은 아이들에게 제가 곧 잘 그러는 것처럼 빙그레 웃어 주지도 못할 것 같았습니다. 어린 저의 존재와 다시 마주 선다면, 달팽이를 삼키는 기분이 될 것 만큼은 확실했습니다.
[SESSION 03. 자존감]
0점에서 시작해 100점에 이르는 '자존감 점수'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누구라도 단숨에 자존감을 끌어올리고 싶겠지요. 하지만 선천적으로 강한 자존감을 타고난 사람은 얼마나 되며, 갖은 풍파에 변함 없이 같은 수준의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만능 열쇠라도 되는 양 ‘자존감’을 숭배하고 떠받드는 풍조가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자존감’이란 잘 팔리는 하나의 ‘허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결국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 인격은 인성이 뛰어나야 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긍정 에너지도 갖추고 있어야 하지요. 이것이 곧 인기 수준과 연결이 되고요. ‘자존감 높이는 비법’이 궁극적으로는, 남들에게 인기를 얻는 법, 남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법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존감이 낮다고 해서 가치가 낮은 게 아니라는, 닳아 빠진 위로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 속성들 하나 하나가 상품인 것 마냥 시장 가격이 붙어 버리는 이 상황은 안타깝습니다. 개별 속성에 대한 수요가 없을 경우, 그러니까 ‘안 팔리는’ 경우 그 속성은 애초에 무가치하거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치부되더군요. 그러고 보면 ‘높은 자존감’이란 소수의 사람에게 허락된 ‘인격적 성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점수를 매기는 것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그 ‘타인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걸까요.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제 성격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어린 시절에 형성이 된 것입니다. 그 시절을 지배했던 어른들이 아주 올곧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을테고 정서적으로 아마 병을 앓고 있었겠지요. 지금의 불행을 그들에게 전가한다고 한들 바뀌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체, 그 자기 위로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말이에요.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은 오롯이 내 몫으로 남았을 뿐인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