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이라는 동화 (2)

루미큐브

by 여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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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담자: 신나은


[SESSION 03. 루미큐브]


짧은 시간이더라도 아이와 함께 놀아주며 마음을 교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던데 말이야 쉽지, 정작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또 그럴만한 체력도 못 됩니다. 한 시간 쯤 놀아줬나 싶으면 겨우 5분이 지나 있던 걸요.


저 스스로조차 ‘놀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럴 법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놀이는 비생산적이자 비실용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득 없는 일’은 그저 낭비이고 사치일 뿐, 어쩌다 짬이 나서 쉬게 되면, 다음 노동을 위해 충전하기 위함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곤 하니까요. 생존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일은 제게 있어 죄다 쓸 데 없는 것일 뿐입니다.


- 지구는 왜 돌아요? 용암은 왜 뜨거운 거예요?

- 그게 말이지…. 그건 원래 그냥 그래.


최근 아이들의 어휘량이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더불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질문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지요. 대부분의 질문에 그건 그냥 원래 그래,라고 답할 뿐입니다. 집요하게 파고들 것을 생각하니 귀찮기도 하고, 저 자신 역시 언제부터일까 모든 것을 그냥 원래 그런 것, 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으니까요. 안 그래도 복잡한 인생,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더 편리하고 효율적 이잖아요. 밤하늘의 빛나는 것을 보고 저게 인공위성인지 별인지 딱 그 정도까지, 그게 별이라면 아, 별이구나, 까지. 달은 어떻게, 별은 어떻게,가 아니라, 그냥 달은 달이고, 별은 별이고. 그 이상은 쓸 데 없다고 생각해 왔으니까요.


얼마 전에 서점에 들렀다 우연히 어릴 때 좋아하던 ‘루미큐브’를 팔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요, 사볼까 잠시 생각 하다가도 2만원이라니 너무 아까운데, 그나저나 2만원 어치의 이득은 가져다 줄까,하며 한참을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결국 돌아섰습니다. ‘1분’을 써서 ‘더 비싼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떨쳐낼 수가 없었습니다.


-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회사원 시절, 동료의 텅 빈 의자 위 아무렇게나 구겨진 노란 담요에 궁서체로 쓰여진 글귀를 보고 자지러지게 웃었던 게 기억납니다. 어느 책의 프로모션용으로 만들어진 상품이었죠. 그러게, 고작 라면 한끼 먹자고 이 발악을 하는 건가 싶어 옆자리 동료를 끌어안고 광광 울고 싶어졌습니다. 남의 사업 불려주는 우리 월급쟁이들이야 그렇다 쳐도 오롯이 자신의 발상으로 창작해내는 사람들의 밥벌이는 또 신성할까요. ‘폴 오스터’라는 작가가 쓴 <빵굽는 타자기>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 돈이 열리는 나무 주위를 돌면서 춤추라는 부추김이 거듭되었고, 사람들은 남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가 발작적인 정신착란으로 픽픽 쓰러져 죽어갔다.**


평생 밥벌이나 하다가 끝나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만큼 시시한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주에 한 TV 프로그램을 멍하니 보다, 순간 뒤통수를 탁 하고 얻어 맞은 기분이 되었는데요. 세계적으로 성공한 성악가인 ‘조수미’ 씨가 전개하고 있는 자선 사업인 ‘휠체어 그네’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수미 씨는, 내내 휠체어에 앉아 생활하는 장애 아동들에게 놀이의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휠체어와 함께 탑승할 수 있는 그네를 여러 곳에 설치했다고 해요. 모르긴 몰라도 그 돈이면 굶어 죽는 아이들이나 병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을 도울 수도 있었을 텐데 선택한 것이 휠체어 그네라니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편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았지요. 과연, ‘생존’을 최우선으로 돕는 것만이 숭고한 활동인가? 장애아에게 있어 ‘놀이’란 감히 넘볼 수 없는 사치인가? 살아갈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라고, 배부른 소리라며 비난하는 사람도 물론 있을 거예요.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사람은 밥을 먹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놀이도 꿈도, 인간으로서의 누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또 숭고한 권리가 아닐까,하고 새삼 생각하게 된 것이 변화라면 변화일까요. ‘우리는 빵을 원하지만, 장미도 원한다’라는 여성의 날 캐치프레이즈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놀아줄 요량도 없이 가만히 아이들 노는 모양새를 지켜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별것도 아닌 일들에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깔깔대는 것이었습니다.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잠시 먼지가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지요. 그래서 그 잘난 나는, 한낱 아이들의 질문에 척척 답해 줄만큼 알았던가 돌이켜보니 새삼 부끄러워졌습니다. 새는 왜 나는지, 우주의 끝은 어디인지,를 차치하고서라도, 안다고 자부하는 분야 혹은 그 옛날 알고 싶어 했던 분야조차 끝까지 안 적이 없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송충이에 놀라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광장을 가로지르며, 열번 스무 번이나 땅따먹기를 해도 지칠 줄 몰랐던 때가 있었습니다. 빨리 지는 해가 얼마나 야속하던지. 노을이 부서질 쯤, 저녁 먹으라며 들어오라는 엄마의 목소리는 클리셰가 될 만큼 국민 공통의 기억인가 봅니다.


몸이 늙어지는 것보다 마음이 늙어지는 것이 더 슬픕니다. 모든 사물이 그렇게나 선명하고 밝았는데, 이젠 모든 게 그저 희멀건 한 안개에 싸여 있는 것 같아요. 한때는 어떤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도 없이, 발견해내고 배워나가는 과정에만 오롯이 몰입했던 적이 있었지요. 성공에 대한 욕심도 없이, 그저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르는 것 자체가 희열인 때도 있었습니다. 나 제법 세상을 알게 되었다고 오만해진 순간, 총천연색으로 찬란하던 세계는 반짝임을 잃었고, ‘왜 사는가’ 에 대해 끙끙 고민하며 구덩이를 파고 들었지요. 슬슬 내려갈 차례라고, 이제 잃을 것만 남았다고요. 왜 먹지, 왜 벌지, 왜 살지, 어차피 죽을 건데.


- 엄마, 이제 우리가 가니까 엄마는 편히 쉴 수 있겠지요?


언젠가 친정 집에 아이들을 맡길 때 한 아이가 제게 말했습니다. 아차 싶었습니다. 아이들은 다 알고 있었구나. 모두 보고, 듣고, 느끼고 있었구나. 이 아이들이 내 품에서 떠나 제 갈 길로 훨훨 떠나갈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 과연,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다시 없을 순간이 되겠지요. 지난 평생 듣지 못한, 아름다운 말들을 듣는 이 순간이요.


- 엄마, 나는 하늘 나라에서 왔어요. 하늘 나라 사람들이 빨리 오라고 했는데, 전 좀 천천히 가려고요. 엄마 얼굴을 오래 보고 싶거든요. 그러니까 엄마, 운동 많이 하고 건강해져서 꼭 200살까지 살아야 해요.


저는 양손의 검지와 엄지를 모아 사각형의 프레임을 만들었습니다. 프레임을 아이 쪽으로 향하고 입으로는 찰칵, 소리를 내었습니다. 이걸로 지금 10초를 저장한거야. 아이는 까르르, 웃습니다. 떡잎 같은 제 손도 서툴게 놀려 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어 봅니다. 그 손을 제게로 향한 채 아이도 찰칵, 소리를 내었습니다.



* 김훈,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 2015

** 폴오스터, <빵굽는 타자기>,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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