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담자: 신나은
[SESSION 01. 모성애]
저에게는 네 살 난 아들 둘이 있습니다. 자연 임신으로 가진 쌍둥이 형제입니다. 다른 엄마들은 아이가 그렇게 예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는데 저는 그렇지가 않아요. 임신 중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고, 태명 한번 다정하게 불러준 적이 없었습니다. 쌍둥이라 자연 분만은 어렵다 하여 제왕절개로 낳았습니다. 수술 전 차가운 금속 침대에 벌벌 떨며 올라가던 공포스러운 기억만이 강렬합니다. 마취과 의사선생님께서 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 깨어 있길 원하냐지 않느고 물어 오셨습니다. 아니요, 전혀, 원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제 뱃속에서 사람 두 명이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평생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35주만에 태어난 미숙아였습니다. 둘 모두 호흡 곤란 상태에 빠졌고 태어나자마자 종합병원 인큐베이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태어나는 모습은 커녕 약 2주 정도 아이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습니다. 남편이 가끔 사진을 보여줄 때도 있었지만, 나는 낳고 싶지 않았어,라고 온몸으로 항거하며 뻣뻣이 고개를 돌리고 있거나, 마지못해 흘깃 보곤 시큰둥해 하기 일쑤였지요. 2주만에 비로소 아이를 안아 보았을 때도 낯설기만 했습니다. 묵직한 메모리폼 인형 같은 것이 딴에 사람이라고 뜨끈한데다 소리까지 내고 있어서 정말 무서웠습니다. 내 손에 이 작은 ‘인간’들의 목숨이 달려 있다니, 세상에 맙소사, 아찔했습니다.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공부해야 했습니다. 시중에 있는 육아 서적들을 모조리 구입해 산후 조리원의 침대 옆 협탁 위에 쌓아 두었습니다. 부적처럼 놓아두긴 했지만, 정작 읽을 마음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산후 조리원의 선생님들은 제게 육아를 책으로 배운다며 놀리듯 말했지만, ‘그래도 참 열의가 대단하시네요.’하며 속 모르는 칭찬을 했습니다. <교감 놀이>, <실전 육아>, <두뇌 발달> 등 산후 조리원이 진행하는 갖가지 클래스에도 참여했습니다만, 어쩌자고 신생아 부모에게 아이 교감과 정서에 관한 교육을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막상 집에 발을 디딘 후부터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아이는 둘째 치고 내 몸은 어떻게 건사하고 정신은 어떻게 돌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고지 받지도 않은 과목의 시험지를 앞둔 기분이었습니다. 책을 좀 더 열심히 읽었으면 달랐을까요. 세상의 모든 육아 서적을 읽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알고보니, 인간사 모든 일들과 마찬가지로 육아 역시 플로우 차트로 정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현실은 상상보다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동안 마음껏 누리며 쓰던 자유, 시간, 돈, 또 그 이상의 일체를 포기해야 했던 건 둘째 치고, 제발, 10분만이라도 잠에 느긋하게 젖어드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빼앗아 간 아이들이 원망스럽기만 했습니다. 비몽사몽 미쳐 버릴 것 같은 정신으로, 올해 갓 결혼한 동생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 나연아, 너는 제발 애 낳지 마. 돈, 에너지, 시간 아껴 뒀다가 전부 너희 부부를 위해 써. 내 말 믿어.
[SESSION 02. 경단녀]
계획된 임신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재직 중이던 회사로 이직 한 지 겨우 반년이 되었을 뿐인데 임신이라니 눈 앞이 노래졌죠. 공표할 염치가 없었기에 배가 부를 만큼 불러올 때까지 임신 사실을 숨겼습니다. 어금니 악물고 독하게 버텨냈던 것들 중 특히 입덧이 심했는데, 업무 중 수시로 화장실 변기 옆에 쪼그려 앉아 올라오는 욕지기를 가라 앉혀야 했습니다. 회의 시간에는 한 귀퉁이에서 납작하게 눌린 채 시들어 가는 개나리 마냥 노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 회사까지 걷던 중 기절했던 적도 있답니다. 이직 한 지 만 1년을 꼭 채우던 날, 덜덜 떨면서 임신 사실을 털어 놓았을 때는 어찌나 면목이 없었는지 마치 죄인이라도 된 기분이었습니다. 임신했다고 유세 떤다는 말이 듣기 싫어 힘쓰는 일,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무실의 불을 끄고 마지막에 퇴근할 정도로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죽어도 ‘경단녀’ 만큼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딩크족으로 지내자고 남편과 결혼 전 합의한 상태였습니다. 임신 테스트기의 두 줄을 확인했을 때는 명치가 콱 막혀오고 눈물이 콸콸 쏟아졌습니다. 어떻게 하지, 어떡하나, 선택지가 있긴 하지 아직. 들어선 것이 쌍둥이인 것을 알고 그 선택지마저 포기했습니다. 지울까 말까 고민하는 건 하나도 아닌 두 ‘명’의 생명에게 차마 못할 짓이더라고요. 7,8주차쯤 되었을 때 절박 유산을 겪었습니다. 회사를 관두고 입원하라는 반 강요 섞인 의사의 권유가 있었지만 그것 만큼은 절대 안된다며 서럽게도 울었습니다. 피가 흐르던 날 새벽 응급실에서 링거 한 병 달랑 맞고 태연히 정시 출근 했지요. 제 어미가 언덕에서 수십 번을 굴렀어도 꿋꿋이 태어난 춘향처럼 태어날 운명이면 태어날 것이고, 떨어질 아이는 기침만 해도 떨어지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와중에 남편은 눈치도 없이 생명줄 단단히 붙들고 있으라는 의미로 ‘딱풀’, ‘밥풀’이라는 태명을 지어줬습니다.
아기자기한 꿈에 잠긴듯한 기억이 사실은 전혀 없다는 것, 신생아 양말 한 짝 배내 옷 한 벌 눈에 들여본 적이 없다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입니다. 뱃속에 있는 생명들은 마치, 제 인생에 빌붙은 기생충 같았습니다. 눈치라도 챈 것인지, 아이들은 자궁 가장 깊숙한 곳에 파고든 채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주변 누구 하나 태몽을 꾸어준 이조차 없었습니다. 오히려 매일 악몽만 꾸어서 혹시 어딘가 불편한 아이가 나오는 것은 아닌지 내내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제발, 여기에서 더 내 앞길 막지만 말아줘.
그럼에도 불구, 막상 낳고 나면 모성이란 것이 조금쯤 생기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흔히 보여지는 것처럼 아이를 안고 활짝 미소 짓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더군요.
요즘 여러 매체에는 그런 말들도 많이 해주시더군요. 모성은 천성이라고 할 수 없으며 아이의 성장과 동반해 자라나기도 한다고요. 아이의 행복만큼, 엄마의 행복도 중요하다고요. 저에게도 모성이 자라나길 기대하며 꼬박 3년을 보냈습니다. 그마저도 5분 대기조 신세로 지냈습니다만. 아이의 꽃잎 같은 하품도 어깨를 짓누르는 철근 마냥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이쯤이면 슬슬 모성이란 게 자라날 때도 됐는데,라는 초조가 쌓여 불쑥 짜증이 폭발했습니다. 어느 날에 가서는 완전히 패배를 선언하였습니다. 결국 나는 괴물이었나보다. 저는 남편에게 이야기했습니다.
- 못하겠어. 애들 어디 맡겨 놓고 우리 여행가자.
친정에 아이 둘을 떠맡기고 일주일 간의 푸켓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4일째 되던 날, 친정 어머니가 아이들의 동영상을 보내 주셨습니다. 동영상 중간 즈음 뚜벅뚜벅,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누군가 현관문 밖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 엄마 왔다!
한 아이가 눈을 반짝,하며 현관을 향해 엉거주춤 둥그렇고 포동한 엉덩이를 드는 순간,
- 엄마는 안와!
다른 아이가 신경질적으로 꽥,소리를 질렀습니다. 새된 호통에 놀라, 엉덩이를 들던 아이가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아차, 싶었습니다. 괜찮아, 귀국해서 좀 더 애정을 쏟으면 돼. 귀국하자마자 아이들을 번쩍 안았으나 아이들은 고개를 있는 힘껏 비틀며 외면했습니다. 어르고 달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들이 삐졌다며 남편과 깔깔대며 웃었습니다. 이것도 한때라고 괜찮아 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예고 없는 7일의 부재는 굳건했던 아이들의 세계를 미묘하게 어그러뜨려 놓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어느 즈음인가 아이들에게 이상 징후가 포착되었습니다. 애착을 표시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가끔씩 마주치는 눈에도 의미가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아동심리상담사를 찾아갔습니다. 아이들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위험 수준이라는 말을 먼저 들었습니다. 다음으로 자폐 스펙트럼*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지요. 제발, 신이시여.
* 자폐스펙트럼은 ‘애정 없는 육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며, 다양한 원인으로 발병할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힌편 아직까지 명확한 발병 기제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자폐 또는 자폐스펙트럼이 잘못된 육아 방식에서 기인했다는 선입견을 가지시는 분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