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라는 동화 (1)

헛개수

by 여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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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담자: 유재영


[SESSION 01. 라마섬]


업무 차 홍콩에 자주 갔던 적이 있습니다. 일을 마치고 운 좋게 짬이라도 나면, 홍콩 도심 페리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혼자 ‘라마’라는 이름의 작은 섬에 가곤 했지요. 홍콩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많고 또 각 섬 마다의 매력이 다른데 이 ‘라마섬’은 영화배우 주윤발의 고향으로 유명합니다. 아티스트들의 수공예품이 빼곡한 상점과 이국적인 펍들이 즐비해 아기자기한 매력도 있고요. 각종 해산물 요리, 특히 관자 요리가 정말 일품인 씨푸드 레스토랑은 어김없이 들르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라마섬을 찾는 첫째 이유는 트래킹 끝에 다다르는 해변에 앉아 맥주 한 병을 마시기 위함입니다. 두세 시간 남짓 땀을 뻘뻘 흘려가며 7km 여에 달하는 하이킹 코스를 걷다 보면, 이제 그만 포기해 버릴까 하는 고비가 몇 번 찾아옵니다. 세 번째의 고비가 찾아올 때 즈음이 되면, 마침내 탁 트인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두 다리가 저린 것도 잊고 한 달음에 달려가 해변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그제서야 시원한 맥주 한 병을 따 벌컥 벌컥 들이켜는 그 카타르시스는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세상 누구도, 무엇도 부럽지 않은 심정이 되지요.


제가 왜 라마섬 이야기를 했냐 하면요.


가장 사랑하는 그 장소에 검은 상자를 하나를 묻고 왔기 때문입니다. 실물이 아닌 상상 속의 상자입니다. 제 머릿속에서 라마섬의 숲과 풀과 흙을 밟고 마침내 그 해변에 다다릅니다. 해변가 모래를 파고 또 파내어 깊은 구덩이 하나를 만듭니다. 속 깊은 곳 가장 괴로운 기억들을 모두 꺼내 늘어 놓습니다. 구깃구깃 하찮게 구겨져 버린 편린들의 가장자리까지 조심스레 매만져 펴보고 꼼꼼히 들여다 봅니다. 그 기억들을 다시 모아상자에 봉한 뒤 라마섬 해변의 그 자리 아주 깊은, 곳에 묻어버렸습니다. 다시, 꺼내 보려면 고된 노동을 피할 수 없을 만큼 깊이 깊이요.


두서없이 얘기할 것 같은 기분이라, 차근차근, 처음부터 이야기를 이어 나가겠습니다. ‘그 분’을 처음으로 뵌 것은 제가 제조업 회사의 해외영업팀의 대리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입니다. 저는 그분, 그러니까 소위 ‘부회장’ 님의 첫 부임을 앞두고 의전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첫 만남에 저는 먼 발치에서부터 환히 웃으며 그 분을 향해 정중히 허리 굽혀 인사를 드렸습니다. 덩달아 화색을 밝히던 그분은 밑도 끝도 없는 얘기를 장장 30분간 내리 늘어놓았고, 기나긴 대화는 ‘고로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라는 시시한 결론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 외 딱히 기억나는 것 없이, 고위직의 웃어른이 하는 말씀 치고 어떤 감명이나 울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 봬도 소싯적에는 한자리 하던 인물이었다고 해요. 전국의 모 제조업 협회 최고직을 지냈지만 비위가 탄로 나기 전에 자진하여 사퇴한 것이라고 직원들이 수군거리더군요. 본인이 아닌 아내의 명의로 땅도 사고 건물도 한 채 샀다는 말도 있고요. 예순도 벌써 중반을 넘어가겠다, 일선에서 물러나 저희 회사의 고문직으로 부임한 것이지요.


회사에서는 그에게 ‘부회장님, 부회장님’하며 허리를 굽신 굽신 정중히 대접하였습니다. 그 분에게는 협회장 시절 부지런히 모아둔 중국 관련 업계 인사들의 리스트가 있었고, 당시 중국 진출을 위한 총력을 동원하던 회사에게는 그 리스트가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부회장 수첩 속의 ‘인사들’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부회장과는 얼마나 깊고 얕은 사이인지도 가늠할 수 없었지만, 한 길 알기도 어렵다는 중국 시장이라는 망망대해에 낚시줄이라도 던져 보자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후, 부회장의 사무실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아내 명의로 된 빌딩 내 한 칸을 사무실로 쓰게 될 예정이라고 하였지요. 대걸레를 박박 문대 바닥을 닦고 손 걸레를 짜내 책상의 먼지 한 톨까지 호호 불며 훔쳐 내었습니다. 빠진 비품은 없는지 체크하고 구색에 흠 되는 곳은 없는지 꼼꼼히 둘러보았지요. 사무실에 제법 윤이 난다 싶을 때 부회장과 나란히 테이블에 마주 앉았습니다. 그분 보시기엔 아직 부족한 모양인지 슬쩍 혀를 차며 벽 이곳 저곳에 걸 액자와 현판을 빠른 시일 내 마련해 달라고 하셨지요. 그 때 부회장의 부인이 다과를 안고 총총 들어섰습니다. 살갑지도, 그렇다고 아주 무뚝뚝 하지도 않았는데 실상은 별다른 색깔이 느껴지지 않는 중년 여인이었다 할까요. 명색이 ‘사모님’ 인데도 몸빼 바지에 늘어진 티셔츠 차림을 한 후덕한 모습 만큼은 이질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모님’께서는 손수 내린 ‘헛개즙’이라며 한 잔 넉넉히 따라 주셨습니다. 헛개수라니, 바깥 양반도 어지간한 주당이신가 보군,하며 생각했지요. 얼음이 녹으며 달캉, 유리 컵 속에 부딪히는 소리가 시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회장은 사업이니 인맥이니 늘 바깥으로 돌았고, 가끔 회사에서 마주칠 땐 팥죽색의 불콰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불그죽죽한 얼굴로 말까지 어눌하여 취해 보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간혹 만취 상태가 되었을 때는 오른쪽 귀밑의 사마귀가 더욱 검붉어 지는데, 그 위에 돋은 세 가닥의 털을 볼 때면 소름이 오소소 돋아날 정도로 싫었습니다.


그의 부임 이후 중국 사업 역시 가속 페달을 밟았습니다. 사무실이 마련된 뒤 한 달 여 남짓, 첫 출장이 잡혔습니다. 이후 달마다 연거푸 중국에 날아가 이런 저런 바이어들을 소개 받았지요. 부회장은 비행을 퍽이나 좋아하는 모양인지 한 달 최소 한 번은 콧바람을 쐬어 주어야 한다며 번번이 들떴습니다. 동행한 임원들에게 고객 등급이니 마일리지니를 과시했고 임원들은 과연 대단하시다며 치켜세우기 바빴지요. 부회장은 비즈니스 고객의 행렬 속으로 사라졌고 임원들과 저는 늘 그렇듯 이코노미 석에 탑승했습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미팅이 하루에 서넛 잡혀 있었습니다. 그저 안면이나 트는 차원인 듯 대개는 길게 이어지는 법 없이 없었고, 기승전 ‘잘해보자’라며 좋은 게 좋다는 분위기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원가율이니, 마진율이니,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때가 돼서야 할 모양이었습니다. 문화적 특성이기라도 한 걸까요, 사실 비즈니스 출장의 목적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융숭한 술자리가 펼쳐지는 게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습니다. 과장된 웃음이 연달아 터졌고 ‘우리는 형제’라는 비장한 결의가 오가는 게 도원결의마저 울고 갈 지경이었습니다. 몸을 부둥켜 안는 것도 모자라 장년이며 노년의 남성들끼리 서로의 입술을 부벼대는 것이 그 어디에서도 목도 못할 장관이었습니다. 과연 삼국지의 나라인가, 누가 유비이고 제갈량인지, 그곳의 모두는 관우 아니면 장비를 위시한 호탕함 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부회장이 농담을 건넸습니다.


- 거, 2차는 제가 대접할테니, 총들 잘 챙겨 두십시오.


좌중이 왁자하게 웃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중국어 구어였던 것인지, 아니면 어학 실력 자체가 부족했던 것인지, 통역하던 저 혼자만 정작 뜻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습니다.


수컷들의 현란한 쇼, 위풍당당한 웃음과 농담 섞는 여유이니 허세 등등이 어지럽게 뒤섞여 공기마저 탁한 듯 했습니다. 부회장 님은 무릇 영업을 하려면 술을 아주 잘 마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나도, 나도 관우인 척 해야해. 바이어가 대접하는 술은 40도 이하의 것이 없었고 그날의 술은 심지어 50도가 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중국 후베이성에서 이 업계를 꽉 잡고 있다는 ‘이회장님’께서는 저의 글라스에 최고급 배갈을 넘치게 따라 주셨습니다. 호기롭게 이를 원샷으로 넘기고 모두의 박수 소리에 한껏 의기양양해 졌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 잠시 도취되어 있었지요. 여장부 아닌가, 열 남자 못지 않은 비즈니스 우먼이라고요. 도취 반, 객기 반으로 멀쩡한 척, 꾸역꾸역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아가며 가까스로 호텔 방에 도착했습니다. ‘브라보, 얼마나 멋진 나인가!’라며 완벽한 승리를 선언한 뒤 알코올에 푹 절은 무거운 몸뚱어리를 침대 위에 털썩 던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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