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개수
내담자: 유재영
[SESSION 02. 강탈]
얼마나 지났을까, 똑똑,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저는 걸어 갔던가요, 문을 열었던가요, 그리고 쓰러졌던가요. 부회장의 ‘이기 뭐꼬, 이기 뭐꼬’ 하는 소리가 귓전에서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내가’, ‘안마를’, ‘불러 달라고 했는데’, ‘안마를 안 불러줘서’, ‘걱정돼서’, ‘와봤는데’, ‘이기 뭐꼬’. 그랬습니다,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부회장 님은 안마사를 방에 보내달라고, 프런트에 전화해 둘 것을 지시했죠. 아차 싶던 것과 동시에 욕지기가 올라왔습니다. 투철한 직업 의식도 잠시 뒷전, 문 옆에 있는 화장실의 변기로 바로 몸을 날렸습니다. 부회장 님은 변기를 붙잡고 토하는 내 등을 두들기며, 그때까지 걸치고 있던 겉옷이었는지, 안쪽 옷이었는지가 거추장스럽다고 했고, 벗어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걱정된다며, 끝내는 침대로 데려갔습니다. 저는 얼굴을 옆으로 돌려 하얀 베개에 한번 더 녹갈색의 토를 뱉어낸 뒤 그대로 기절했습니다.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니 날은 벌써 저물어 있었고 방안의 물건들은 어둠에 잠긴 채 희미했습니다. 맨 살에 닿은 이불이 차가워 소스라쳤습니다. 뭐지, 하며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큰 일이 벌어진 것을 이내 알아챘습니다. 무시무시한,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아주 아주 커다란 일이 터지고 만 것입니다. 베개의 토사물, 기억이 났습니다. 침대 시트에 군데군데 묻어 있는 핏자국과, 머리카락이 뜯긴 흔적과, 얼굴에 난 이 상처들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드문드문 희미하게 기억났습니다. 반쯤은 미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전화를 돌려 댔습니다. 통화 내내 경악에 찬 울음을 토해내고 짐승 같은 비명을 내질렀습니다.
단 1분이나마 일정에 못 맞추어도 세상 무너지는 줄 알았던 제가, 다음날 업무 스케줄을 모두 펑크 내고 새벽 첫 비행기로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귀국 즉시 해바라기 센터로 향했습니다. 진술서를 쓰고, 경찰과의 질의 응답을 녹화하고, 성폭력 키트로 증거를 채취했고, 곳곳에 남은 부상들은 사진으로 기록했으며, 당시 착용하고 있었던 의복과 속옷을 모두 제출했습니다. 일련의 절차와 대기를 번갈아 거치니 다음날 새벽 별이 떴을 때 비로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네, 저는 이 사실을 당시 재직 중이던 회사와 동행했던 임원들, 직속 상사에게 모두 알렸습니다. 그 뒤로는 지겹도록 긴 공방이 이어졌습니다. 경찰과 검사, 변호사와 판사 앞에서 같은 내용을 구술하고, 또 기록하는 나날들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참고하실 수 있도록 가져온, 진술서 일부입니다.
[진술서 (일부 삭제)]
1. 본인은 XXXX년 X월 XX일부터 XXXX년 X월 XX일까지 중국 우한으로 같은 회사 직원인 김상호 전무, 서준영 부회장 (고문역, 계약직)과 함께 영업 목적의 출장을 감.
2. 출장 둘째 날 오후 X시경 시작된 바이어와의 미팅이 끝난 뒤 식당으로 이동함.
3. 오후 X시경 우한 시내에서 바이어인 중국 호북성 협회의 이푸양 회장, 이푸양 회장 아들 이샹타이, 그리고 당사의 김상호 전무, 서준영 부회장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함.
4. 점심 식사 중 53도의 바이주 (배갈) 2병을 5명이 나눠 마심. 그 중 본인은 200ml 컵 가득히 약 3-4잔 정도를 마심.
5. 이푸양 회장은 연거푸 술을 마실 것을 권함. 또한 서준영 부회장은 원샷으로 마실 것을 강권함. 원샷 후 다시 술을 따라주고 계속 마실 것을 강요함. 서준영 부회장이 “무릇 영업을 하는 사람은 술을 잘 마셔야 한다” 고 강조함.
6. 김상호 전무, 서준영 부회장, 본인 세 사람이 취한 채로 호텔로 돌아옴. 호텔 로비에서 서준영 부회장이 본인에게 “안마를 불러달라”고 얘기했음. 본인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본인의 방으로 올라왔으며 김상호 전무 및 서준영 부회장 역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감.
7. 본인은 본인의 방으로 돌아와서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그대로 침대에서 잠듦.
8.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으나, 방을 누르는 벨 소리에 깸. 문을 열어보니 서준영 부회장이 서 있었으며, 그대로 본인의 방으로 들어와서 “왜 안마를 불러주지 않느냐.”라고 함.
9. 본인은 그 당시에도 술이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였으며 몸을 자유롭게 가눌 수 없는 상태였음.
10.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인 영향이었는지, 속이 좋지 않아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토함.11. 변기에 토하는 중 겉옷(자켓과 폴라티)이 더러워졌으며 자켓을 벗자 이를 지켜보던 서준영 부회장이 “어이그, 이게 뭐냐, 여기 다 묻엇다, 여기 다묻었다, 벗어라” 라면서 폴라티를 벗겼음.
12. 서준영 부회장이 “저기 가서 누워라”라면서 침대로 잡아 끌었음. 당시 정상적으로 대화하거나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였으며 빨리 침대에 눕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었음.
13. 나머지 입고 있던 옷에 대하여 서준영 부회장이 “이런 건 왜 입고 있냐, 빨리 벗어버려라.”라며 모든 의류를 벗기기 시작함. 당시 몸이 축 늘어져 힘으로 저항할 수 없는 상태였음. 침대에 누운 채 연달아 세 번 이상 토하였음.
14. (상세 내용 생략)
15. 서준영 부회장이 어떻게 방을 나갔는지 기억나지 않음. 정신을 차려보니 중국 시간으로 저녁 X시경이었으며 빈 방에 혼자 있었음. 모든 일이 생생하게 떠오름. 주변 지인 서너 명에게 (이하 생략) 바로 전화하여 울면서 성폭력 정황을 알림.
16. 이후 서준영 부회장에게 전화하여 큰 소리로 울며 “나에게 왜 그랬냐며” 거듭 다그쳤으나, 서준영 부회장은 자신은 나의 토사물 뒤처리를 해준 것 밖에 없다며, 본인이 생각하는 성접촉은 절대 없었다며 부정함. 본인이 대사관과 경찰에 알릴 것이라고 얘기하자 갑자기 울기 시작하며, “유대리님,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면 저는 이곳에서 뛰어내려 죽어야 합니다. 자살해야 합니다.” 하며, 자살을 암시하는 말만 수차례 반복함. 통화가 의미 없다고 생각되어 전화를 끊음. (상세내용 : 녹취록 별첨)
17. 본인은 더 이상 서준영 부회장과 대면할 수 없었으며, 이에 김상호 전무에게 알리고 묵고 있던 호텔에서 체크아웃 한 뒤 인근의 다른 호텔로 옮김. 한편 미리 끊어 두었던 항공편은 무시하고 새로운 항공편을 끊어 XXXX년 X월 XX일 아침 비행기 편으로 한국 귀국함.
18. 인천공항에는 오후 약 X시경 도착하였으며, 바로 경찰병원의 해바라기 센터로 가서 사건을 접수하고 디엔에이 검사를 받음.
(※ 녹음파일, 진단서존재)
외상 후 장애는 더 괴로웠습니다. 세상은 모두 악마, 성기, 박쥐 등 로르샤흐의 검은 얼룩으로 여기 저기 뒤덮여 있었습니다. 사람의 피부가 닿을 때마다 저는 불에 덴 듯 놀랐습니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조카가 옹알 거리며 저에게 안기려 했을 때, 바닥에 홱 밀쳐냈을 정도였으니까요. 비슷한 연배의 장년 남성들은 모두 부회장으로 보였습니다. 그 손과 눈들이 무서워, 대중교통조차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울먹이다가, 흐느끼다가, 통곡하다가, 표현 가능한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눈물을 흘려낸 끝에 멍하니 넋을 놓아버릴 즈음, 일전에 헛개수를 내어주던 ‘사모님’ 을 한번 뵈었습니다.
저는 끝까지 합의를 거부하였습니다. 사모님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습니다.
- 아들 딸은 모르고 있어요. 자꾸 제 아버지 행방을 물어요.
혹시 지금 토끼굴에 빠진 걸까요, 발 밑에서 흐느끼는 저 여인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영원히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별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무심히 눈을 떨군 채 얘기했습니다.
- 서준영 씨가 친필로, 진심을 담은 사과문을 써준다면, 한번 고려해 볼게요.
그렇지만 부회장이 사과문을 쓰는 일은 없었고 결국 합의에 이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는 주장도, 혹은 쌍방이 좋아서 한 일이었다는 주장도 모두 거짓말 테스트기를 통과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연속으로 항소를 올렸지만 모두 기각되었지요.
헛개수가 숙취를 해소할 수 있다니 어림도 없는 소리. 바다만큼의 배갈에, 헛개수 한 병을 뿌려봐야. 한번 죽어버린 영혼에, 고작 2년 6월의 징역형이라는 처방이라 해봐야. 불에 타버린 생살이 짓무르다 터지는 고통 속에서 거듭 심폐 소생을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제 안의 어떤 한 부분은 그렇게 영원히,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