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라는 동화 (3)

헛개수

by 여날


내담자: 유재영


[SESSION 03. 정의]


형이 선고되기까지 꼬박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간 동안의 기억은 거의 상실되었습니다. 사건 이틀 후, 회사의 직속 상무가 걸어온 어처구니 없는 전화 한통 정도만 겨우 기억할 뿐입니다.


- 혹시 말이야, 다음주 ‘상해 박람회’ 까지만 참석해 주면 안될까? 이제 와서 대체할만한 사람을 구할 수 없어서 말이야. 유 대리가 기획부터 쭉 담당 해왔으니까 부탁 한번만 하자.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습니다. 하지만 여차했다가는 상황이 불리해질 것 같았습니다.


- 그 놈은 개새끼야. 감옥에 처 넣어야 해. 필요하면 모두 지원해 줄테니까, 부담 없이 말해.


위로는 모두 허울 좋은 말로 들릴 뿐이었습니다. 눈 앞에서 장담하는 저 임원진과 대표가, 퇴사하는 순간 안면 몰수하고 제게 불리한 증언을 할 것만 같았습니다. 심지어 출장에 동행했던 전무는, 부회장과 50년지기 막역한 동향 친구였던 것입니다.


2년6월의 징역형이 선고되는 날까지 결근 없이 아득바득 출근하였습니다. 사무실에서 기계적으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기타 일상들은 의미를 갖지 못한 채 기억에서 모조리 말소되고 말았습니다.


부회장의 대법원 항소가 기각되던 날, 드디어 그 회사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민사소송을 진행 중입니다만, 부회장 앞으로 된 재산은 1원 한 푼 없더군요. 그 많은 땅과 빌딩들을 모두 ‘사모님’의 명의로 바꾸어 둔 것이지요. 회사에도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만, 회사는 이번 건이 개인 간의 단순한 일탈일 뿐이며, 사측의 책임은 일절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책임이 없다, 보상 능력이 없다, 의무가 없다,며 책임을 떠넘기기 바쁜 얼굴들 가운데서 홀로 싸워내는 일은 몹시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변호사가 전해주는 말을 들을 때 마다, 몸이 벌벌 떨리고, 눈이 팽 돌고, 두 다리가 무너지며, 머리 속이 아득해지고, 하늘이 노래지곤 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이 제 개인의 문란한 품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상대측이 주장해 왔을 때는 차라리 제 몸뚱어리를 갈가리 찢어 놓고 싶었습니다.


형사 재판 출석 당시, 상대 변호사가 했던 질문은 제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수치스러운 일을 남들에게 알릴 생각을 했는지요? 만약 제 아내가 그런 일을 당했으면, 저는 그저 조용히 혼자 입 다물고 있어주길 바랬을 것입니다. 당신의 저의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재직 기간 동안 수시로 연락하며 살갑게 굴어왔던 업계 기자들에게도 도움을 청해 보았습니다. 리스트에 열거된 수십 명에게 차례 차례 전화해 대략적인 사실과 사건 번호를 알려 보았습니다.


- 그게 말이죠, 쯧, 죄송해요, 대리님. 요즘 저희 대표 님하고 그쪽 대표 님하고 사이가 아주 막역해요. 밀월 중이시라니까요. 그쪽 대표 님께서 1면 광고를 2년이나 계약해 주셨거든요.




왜 하필 나야?라는 질문을 해보았습니다만, 답은 이미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은, 그냥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라마섬에 묻어둔 상자를 다시 꺼내 열었습니다. 내리 쬐는 햇볕 아래 기억들을 내버려 둡니다. 생생하고 시뻘건 경험도, 어느 순간에 가서는 빛 바랜 호랑이 그림처럼 차츰 표백 되어 가겠지요.


내버려 둔 채, 저는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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