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이식 우산
내담자: 구정연
[SESSION 01. 우산]
드럭스토어를 구경하다가 빈 손으로 나오기가 멋쩍어 우산을 하나 샀습니다. 베이지색 바탕에 드문드문 노란 스마일이 뜬금없이 웃어주는 귀여운 우산입니다. 우산을 고심해 골라본 적은 없으니, 잃어버리면 꽤나 아쉬워 하겠지요. 일평생 우산에 탕진한 금액을 생각해 보면 다른 부자는 못 되어도 최소 우산 부자는 되었어야 마땅할 텐데, 현관에 보관된 우산은 한 두개 내지의 오차범위 내에서 늘 일정한 개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산 질량 보존의 법칙’은 저 말고도 꽤 많은 사람에게 적용될 걸요. 비가 온종일 이어 내리지 않는 한 어디엔가 떨구고 오기 일쑤인데 까짓 우산이니까 굳이 찾으러 멀리까지 가는 법도 없고요. ‘잃어버린 우산’은 클리셰이지 않나요?
하늘이 찌뿌드드한 날 운 없는 우산 하나를 들고 나설 때면 이 우산과의 인연도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부터 하게 됩니다. 우산 잃는 것 쯤이야 흔하다고 치더라도 저는 좀 더 심한 경우이긴 합니다. 뭉게구름 무늬가 화사한 하늘색 우산을 선망해 왔지만 오래 쓸 자신이 없으니 언감생심이지요. 가방에 넣을 수 조차 없는 기다란 장우산을 손에 꼭 붙들고 다니는 사람은 일 처리의 매무새도 야무질 것 같아 왠지 존경하게 됩니다.
난데 없는 곳에서 주인을 잃은 수 많은 물건들을 생각하면 그깟 우산에 쓰는 돈 쯤이야 우스운 정도입니다. 1년 내내 월급 모아 어렵게 장만한 생애 첫 명품 가방을 치킨 집에 두고 와버린 적도 있습니다. 친구 차에 얹혀 왔던 터라 지갑 꺼낼 일도 없었겠다, 귀가하고 나서야 알아챈 것도 다행이었지요. 한겨울 회사 동료들과 떠들썩하게 점심을 먹고 난 뒤 식당에 코트를 버려두고 온 것을 퇴근 즈음에 알아챈 적도 있으니, 무수히 잃어버린 머플러 쯤이야 말해 뭐해요. 휴양지 리조트로 가는 봉고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예뻐 사진을 찍으려던 차에 핸드폰을 비행기에 두고 내린 것을 알기도 했고, 제주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 시간에 겨우 맞춰 ‘세이프!’를 외치는 순간 렌터카 안에 캐리어를 두고 왔다며 혼비백산한 적도 있습니다. 그나저나 저 혼자만 아찔하면 될 것을 죄 없는 사람들의 터진 복장들은 제 평생 어떻게 기워 내겠습니까.
이 정신 머리를 달고 일상생활이야 어떻게 해나간다 쳐도 회사 내에서의 실수는 직원들과 회사 전체에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으니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꼼꼼함이 요구되는 작업에 약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남들이 한 두 번 볼 것을 열 번, 스무 번씩도 더 뜯어 보곤 하지요. 그럼에도 실수가 나올 때가 있는데 꼭 귀신이라도 씐 것 같은 기분입니다. 신입 사원 시절, 참고 참다 분노한 사수가 마우스를 모니터에 내동댕이 칠 지경이었으니까요. 몸 안에서 사리 몇 개쯤, 아니 수십 수백 개 쯤은 빚으셨을 사수 님께 지금이라도 깊은 사과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주로 통계 데이터를 다루는데요, 업무의 대부분이 하필 연산이나 숫자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소한 부호 하나만 잘못 입력해도 출력 값이 엉망이 되는 아주 섬세한 작업입니다. 세미콜론은 제대로 입력 하였는지, 명령어는 틀리지 않았는지 해부라도 하듯 꼼꼼히 뜯어 본다 쳐도 유독 실수가 많습니다. 모니터가 너덜해질 정도로 보고 또 보는 것이 무색하게 사고는 터지지, 나란 인간의 효용성은 의심스럽지, 자존감은 기다렸다는 듯 하강 나선을 타고 신나게 미끄러지곤 합니다. 우울의 늪에 상주하는 흑색 자아가 어서 와, 또 보네.하며 음침하게 맞아주는 지겨운 연쇄 작용의 반복이 벌써 수 년째 연속되고 있습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열 번 스무 번씩 거듭되는 실수는 이미 ‘잘못’ 아니면 ‘고의’여서 동료들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곪고 곪은 마찰은 퇴사로까지 이어지니 계속 이런 식이면 살풀이 굿이라도 해야 할 판입니다.
[SESSION 02. 살풀이]
아주 우연히 ‘성인 ADHD’에 대한 유튜브 콘텐츠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침대에서 뒹굴며 모기 물린 자리를 벅벅 긁는 잉여로운 시간에도 메시아는 불쑥 찾아오는 모양입니다. 얌전하고 내성적인 제 성향과는 영 반대쪽이라고 여겼던 ‘ADHD (과잉행동장애)’에 대해서는 여태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는데 말이지요. 성인 ADHD가 아동 ADHD와는 다소 다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양상에 따라 종류가 나뉘어 진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인터넷을 뒤지며 성인 ADHD에 관련된 정보들을 찾아보니 많은 항목이 저와 일치했습니다. 여기 프린트해 온 것이 있으니, 한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심리 분야의 전문가이시니 잘 알고 계시겠지만요. 1번에서 12번까지의 항목이 저의 평소 모습과 꼭 맞아 떨어집니다. 그 외에는 제 ADHD 양상과 다소 다릅니다.
01. 일을 순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 (O)
02.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O)
03.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시작하지만 끝마치기 어렵다.(O)
04. 책을 읽거나 대화하는 도중 쉽게 주의가 분산된다.(O)
05. 어떤 일에 과도하게 집중한다.(O)
06. 정밀한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O)
07. 조심성이 없어 실수를 많이 한다.(O)
08. 다른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O)
09. 지속적인 정신력을 요하는 작업을 피하거나 싫어한다.(O)
10.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즉각적으로 말한다.(O)
11.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다.(O)
12. 불필요하게 끊임없이 걱정한다.(O)
13. 위험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한다.(X)
14.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불쑥 대답해 버린다.(X)
15. 차례를 기다릴 때 초조하고 답답하다.(X)
16. 술, 담배, 게임, 쇼핑, 일, 음식 등에 깊이 빠져든다.(X)
17. 가만히 있지 못하고 손발을 움직이거나 몸을 뒤튼다.(X)
18.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한다.(X)
19. 가끔 창조적, 직관적, 지적으로 우수해 보인다.(X)
20. 돈을 충동적으로 쓴다.(X)
약식 자가 진단만으로도 절반 이상은 제 이야기였습니다. 환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 받고자 난생 처음 신경정신과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전문가 상담과 설문지 작성, 온라인 테스트를 거친 끝에 저는 당당히 ‘ADHD 환자’임을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개중에 과잉 충동 양상이 두드러지지 않지만 쉽게 주의력이 분산되는 ‘ADD’*라고 하더군요. 진단을 했으면 처방이 따라야 한다, 최소 처방의 가능성이 생긴 것이니 홀로 헹가래라도 치고 싶은 기분이었지요.
ADHD라고 하면 흔히 과잉 행동 장애를 떠올리곤 합니다. 이런 ADHD를 ‘충동우세형’ 이라고 하는데, 저처럼 ‘주의력결핍’ 증세가 우세한 ‘조용한 ADHD’의 경우 증세를 쉽게 알아챌 수 없다고 해요. 불안 장애나 우울증으로 잘못 진단 되는 일도 흔하다고 합니다. 들어보니 ‘조용한 ADHD’ 환자는 전체 ADHD 환자 중 약 20% 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원체 얌전하고 내성적이었던 것을 ‘원래 그런 성격’ 또는 ‘천부적 기질’ 정도로만 여겼고, 그런 성향 때문에 불안이나 우울에 더 취약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 정도면 ‘조용한ADHD’는 위장술의 천재인지도요. 쏟아지는 질타 속에서 내가 왜 이러지, 귀신에 홀렸나, 유령에 씌였나,라고 자책하던 지난 세월을 생각해 보니 새삼 억울했습니다. 진단서를 깃발처럼 흔들고 싶었습니다. 저를 원망했을 피해자들을 찾아가 구구절절 변명하고 싶었습니다.
* ADD(Attention Deficit Disorder) : ADHD와 비슷하지만, ADD는 과잉 행동은 나타나지 않고 집중만이 안 되는 경우(주의력 분산)이다. 현재는 정식 명칭이 ADHD-Predominantly Inattentive, 약어로 ADHD-I로 변경되어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