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라는 동화 (2)

접이식 우산

by 여날


내담자: 구정연


[SESSION 03. 치료, 치유]

ADHD는 약물로 치료가 가능하다고 하여 약을 처방 받기로 하였습니다. 조그마한 알약 몇 알이 ‘성격’이라고 여겼던 제 일면을 드라마틱하게 바꾸어 놓을 작정이라니, 알고 보면 기질의 절반 이상은 철저히 생리적이고 기계적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크고 작은 실수도 거짓말처럼 말끔히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다,라는 옛말이 무색하게 성격은 사실 병리적인 현상에 불과했던 것일까요. 육체와 마찬가지로, 정신 역시 극도로 섬세하고 정교한 기계일 뿐인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전 9시마다 각성에 들게 하는 것은 이제 커피나 레드불이 아니라 알약 ‘콘서타’**였습니다. 콘서타는 정신을 맑게 하고 업무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마무리까지 꼼꼼하게 할 수 있는 기민함까지 벼려 주었습니다. 일광욕을 하세요, 운동을 하세요, 그리고,


- 에너지 세럼, 콘서타를 드세요. 수행 능력을 100% 끌어 올려 드립니다.


한 알을 먹고 나면 30분 안에 슬슬 약효가 돌아 가동 준비 완료가 됩니다. 저란 인간의 효용성도 제법 쓸만한 레벨까지 올라가지요. 이런게 자존감이라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예쁘고 우수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소위 ‘젊은 피’에겐 지칠 권리도, 좌절할 권리도 주어지지 않으니까요. 내가 가진 능력이 사실 이것밖에는 안돼요,라는 말을 감히 어떻게 털어놓을 수 있겠어요. 약물이라는 효율적인 도구를 활용해 나란 인간을 천천히 조작해 나갔습니다. 꼼꼼해지고, 성실해지고, 지루한 일도 견뎌 내고, 관심 없는 이야기에도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용 기간이 어느 정도 길어지자 의존과 내성이 생기더군요. 태양까지 높이 높이 올라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달고 있었던 것은 이카루스의 날개였습니다.


대가는 정체성의 일부였습니다. 1백 퍼센트의 정체성을 내어주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약물에 조작된 것이 과연 진짜 나인가,라는 고루한 질문을 던지자는 것도 아닙니다. 치료와 의존 사이를 가르는 명확한 선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그 균형을 찾지 못했을 뿐입니다. 약 복용 당시엔 어느 때 보다 명민하게 업무 수행을 해내었고, 최소 절반 이상의 공로는 콘서타의 것이었습니다. 과제에 맞설 때마다 약 없이는 해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시나브로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환상의 팀이었지만, 어느 순간에 가서는 제 갈 길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업무 분야 자체성향과 맞지 않았음을 인정했습니다. 다소 늦게나마 그림 치료 분야로 진로를 전향하였고, 지금은 콘서타를 중단한 상태입니다.


일평생 제 부주의가 일으킨 크고 작은 소동들은, 나비의 사소한 날갯짓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반향이 무시할 수 없는 소용돌이를 일으켰고, 거기에 휩쓸린 인생은 마치 우연처럼, 지금의 처지에 이르게 되었네요. 인생 초반, 미리 콘서타와 손잡았다면 저는 지금쯤 더 나은 자리에 있었을까요. 가보지 못한 그 길은 평탄했을지, 눈부셨을지, 사실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지요.


가끔은 비가 오더라도 우산 없이 지내면 어떠랴 생각합니다. 혹시 우산 없이 빗속을 걸어 보신 적이 있나요?


어느 여름날, 강한 태풍이 몰아친 적이 있었습니다. 대낮인데도 어둠이 깔린, 종말 같은 날이었지요. 뒤집어 지다 못해 끝내 살이 부러진 우산은 길가 쓰레기통에 버려버렸습니다.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판에 맥없이 펄럭이는 우산이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세찬 물줄기를 견디며 걷기에 샌들 끈은 너무 가늘고 심지어 굽도 높았습니다. 저는 마침내 신발을 벗어 들어 맨발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남들 눈치보랴 주저하던 것이 무색하게, 차갑게 젖은 물 속을 헤집는 맨발은 가볍기 그지 없었고 심지어 황홀한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물줄기야 콸콸 쏟아져라, 산뜻하기까지 했던 그날의 해방감 만큼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누가 봐도 미친 여자 같았겠지만, 사실 저 미친 여자가 맞았잖아요. 이 우산조차 얼마쯤은, 남들 눈을 의식해서 쓰는 것일 뿐인 걸요.



** 콘서타 (Concerta): 메틸페니데이트염산염.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치료제.

*** 앨리스클레이먼, <슈퍼맨각성제 (Take Your Pill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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