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담자: 서재원
[SESSION 01. 중독]
안녕하세요. 신경정신과 주치의 선생님의 권유를 받고 이곳에 오게 된 서재원 이라고 합니다.
보통 '건강 체질'을 '몸'의 건강과 동일시 하는 듯 합니다. 그에 비하면 타고난 '마음'의 기질은 상대적으로 고려되지 않고 있지요. 선천적으로 허약한 마음을 타고난 사람들은 많습니다. 저는 조울증, 그러니까 양극성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완치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큰 기복 없는 감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약물을 복용하고 있고요. 글쎄요,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에 빗댄다면 저는 평생에 걸친 독감을 앓고 있는 셈입니다.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생각이 들다가도 다음날에는 이내, 모든 게 잘못 되어 가고 있다는 절망감에 시달리곤 하는데, 예고장 없이 불쑥 끼어드는 감정들과 일일이 맞서자니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닙니다. 조울증은 유독 치유가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다, 여타 신경정신질환에 비해 예후도 좋지 않아 약 20~30%대의 높은 자살률을 보이기도 하지요.
조울증은 ‘조증’과 ‘울증’이 번갈아 찾아오는 병입니다. ‘조증’의 ‘조’자는 한자로 ‘급할 조’ 이고 ‘울증’의 ‘울’은 잘 아시다시피 우울증의 ‘울’과 같은 뜻입니다. ‘조증’이라고 하면 흔히 들뜨거나 기분이 고조된 또는 지나치게 즐겁거나 흥분한 상태를 떠올리곤 하지요. 조증의 양상도 사실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곤 합니다. 저의 경우 조증 시기에 불안감이 현저히 높아집니다. 맨 유리 긁는 소리라도 듣듯 예민해 지고 작은 일에도 심하게 짜증이 나지요. 이러한 조증은 앞서 말씀드린 ‘유쾌성 조증’과는 달리 불쾌한 기분을 수반한다 하여 ‘불쾌성 조증’이라고 부릅니다. ‘우울’과 ‘불쾌’ 사이를 넘나드는 인생이란 버텨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사회 생활을 하게 되면서 그 주기는 짧아지고 곡선의 경사는 가팔라져 주기적으로 폭음을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알코올에 의존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실 향정신성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에게 술은 절대적으로 금기시 됩니다. 이성으로 쉽게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중독에 빠지는 ‘경향성’이 강한 편이고 지금의 탐닉 대상은 알코올입니다. 한때는 약물에 중독된 적도 있었습니다. 1회 복용량이 1~2알 정도로 제한 되어있는 진통제의 정량은 개나 줘버린 대책 없는 인간입니다. 수면제를 한꺼번에 대여섯 알 씩 복용하고 몽롱한 기분에 빠져 기억하지도 못할 일들을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타 병원에서의 처방 기록 조회가 어렵던 시절에는 병원을 순회하며 약을 모을 수 있었지만, 마약류 통합 관리 시스템이 생긴 이후로 그것마저 어려워졌습니다. 한 개인에게 처방 된 향정신성 의약품의 기록이 철저하게 관리되니 ‘약쟁이’ 블랙 리스트에 오르지 않으려면 주의해야 합니다. 약의 처방을 늘려 달라고 요구했다가는, 의사마저 싸늘한 경멸의 시선을 던지기 마련이니까요. 약물 대신, 급한 대로 도수 높은 소주나 와인, 차츰 독주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고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는 폭음과 폭식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음식과 술로 배를 채우면 공허한 속이 그나마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니까요. 이런 자기파괴적 처방도 일시적일 뿐입니다. 옹이처럼 박힌 궤양은 영역을 넓혀가고, 자기 비하의 뿌리는 썩어들어 갑니다. 맨 정신의 권태와 혐오를 차마 견뎌내질 못해 다시 독주에 손을 댑니다.
신경정신과 주치의 선생님께서 가장 우려하시는 부분은 제 육체의 건강입니다. 정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몸을 ‘모시라’라고 거듭 강조하시지요. 운동을 해라, 일광욕을 해라 등 별 감흥 없이 단물 빠진 조언일 뿐이지만요. 순수한 ‘요양’차원에서 폐쇄 병동 입원을 권유 받기도 하였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먹고, 잠드는 몸의 규칙을 만들면, 정신 역시 자연스레 규칙을 찾아간다는 것이지요. 차마 입원을 결심하진 못했습니다. 소위 ‘정신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이 회사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오후 2시 전 직원의 졸린 눈을 번쩍 뜨게 할 ‘맛있는’ 가십거리가 될 테니까요.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의 ‘업무적 주장’을 더 이상 진지하게 들어주지도 않을테고요. 수근거림을 견뎌내야 하는 것도 모자라, 생계 자체가 위험해 질 수도 있습니다. 자연스레 잠적하기 위해선 여기 저기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딱히 기발한 변명 거리도 떠오르지 않고요. 날달걀이라도 다루듯 할 가족들의 조심스러운, 혹은 끈적한 연민이 뚝뚝 묻어날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 차마 진실을 알릴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상담을 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타협점을 찾은 것이지요.
두 개의 접시에 육체와 정신을 각각 올린 저울을 상상해 봅니다. 제 저울은 단연코, 압도적인 정신의 무게에 눌린 채 꿈쩍도 못하는 모양새일 것입니다. 한낱 육신이야 어찌되든,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신경의 아픔이나 달래는 것이 더 급합니다. 육체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에서 나아가 몸을 ‘신주 단지’ 마냥 섬겨야 한다는 말을 듣자 예상 외로 울컥해졌습니다. 위대하신 정신의 수발을 드는 하수인이자 도구일 뿐이었던 이 하찮은 몸뚱어리가 존재의 절반이라니. 차라리 따뜻한 국밥 한 숟갈을 떠먹고 뱃속이 따뜻해 지면, 그게 또 마음의 위로가 되어 눈물이 펑펑 쏟아졌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밥 숟갈 위에 반찬 한 점 올려주는 것이 애정’이라는 말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미역에 친친 감긴 듯 눅진한 몸이 지긋지긋합니다. 오전에는 메마른 편도, 저녁에는 욱신한 두통이 성가십니다. 근육마다 구석구석 녹슬어 있는 피로를 떨쳐내기 위해, 커피나 약물을 남용하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약발도 듣지 않아 정량의 서너 배 쯤은 복용해야 겨우 약효가 나타나는 듯 합니다. 이쯤이면 코끼리 하나쯤 거뜬히 쓰러뜨릴 수 있을텐데 왜 인간 하나조차 쓰러뜨리지 못하는 걸까요. 표기되어 있는 정량이란, 뭐 유통기한 같은 그런 게 아닐까요. 지키면 가장 좋지만 그렇다고 한계점은 아닌. 선 넘었다고 해서 곧 죽을 만큼 치명적이지도 않은, 뭐 그런 것이요. 냉소 위에 조롱을 얹듯 때때로, 술과 함께 꿀꺽 삼키곤 합니다. 진통제는 정신적 고통까지 경감 시켜 준다니 얼마나 좋게요. 얼마나 더 쏟아 부어야 낚시 바늘에 꿰인 듯 너절한 육신과 신경이 마침내 녹다운 될런지요.
여느 날과 같이 피로를 떨쳐내지 못해 텅 빈 눈으로 멍청히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녀석의 이야기가 제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습니다.
- 난 신혼여행으로 멕시코 칸쿤에 다녀왔는데 말이야, 그곳에서는 하루 종일 취해 있을 수 있었어. 24시간 술이 공짜일 뿐더러, 알코올 종류 별로 정수기까지 있었단 말이지.
알콜 정수기라니, 이 얼마나 참신한 발상입니까. 그곳은 지상 낙원이자, 천국이자, 무릉도원이 아닐까요. 이번 생이 끝나기 전, 기필코 칸쿤에 가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30%의 확률로 자살을 한다면, 그 장소는 100% 칸쿤이 되지 않을까요. 버린 생, 다시 목표가 생긴 기분이었습니다. 술에 푹 절어 지상의 모든 고통을 잊은 채 돌고 돌고, 영원히 돌다가 끝내는 버터가 되어버린 호랑이들처럼, 저도 그냥 한 덩어리로 녹아 내리고 싶었습니다. 술, 약물, 맵고 짜고 기름진 음식, 듣도 보도 못한 막장 드라마, 그게 무엇이 되었든, 지금 이 고통을 잊고 몰입할 만큼 흡입력이 강력한, 초월적인 어떤 것이요.
- 술을 끊으세요. 카페인을 끊으세요. 약은 단 한 알도 남용하지 마세요.
- 선생님, 그럼 저는 대체 무슨 낙으로 사나요?
1분 1초의 권태를 죽이며 살 이유는 대체 뭐죠. 차라리 손톱 아래 개미나 꾹꾹 눌러 죽이고 말지요. 선생님께서는, 기왕에 중독에 취약한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 좀 더 생산적인 중독을 찾아보라고 권해 주시더군요. ‘이런 맛’ 에 살 수 있는 생산적인 중독, 그런 게 있기나 한지 의문입니다. 그 말은 추상적입니다. 무책임합니다. 너무 아득하고, 너무 막연할 뿐입니다. 왜 생산적이 되어야 하는지, 그 근원적인 물음은 차치하고서라도요.
[SESSION 02. 신주단지]
몸아, 몸아, 애쓴다. 너도 나처럼, 버텨낸다고 애쓴다. 신주단지는 커녕, 싸구려 바가지 조차 못 되었으나 묵묵했던 육신의 지난 세월이 안쓰럽다는 생각은 듭니다. 어쩐지 제 절반쯤은 늘 채워지지 않았고, 정신을 마비 시켜 그 몫을 메우려다 마음은 커녕 육신마저 구제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른 듯 합니다만.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일본에서 한평생 사시던 제 이모 할머니께서는 한국에 오실 때면 가끔 저희 집에서 묵곤 하셨습니다. 묵고 난 뒤 떠나시는 때에는 바르게 서서 곱게 합장을 한 뒤 당신이 묵었던 공간을 향해 몇 번이고 깊이 허리를 숙이셨습니다.
- 지난 며칠 무사히 머물다 갑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빈 방에 왜 절을 하냐고 묻는 제게, 이모 할머니께서는 당신께서 귀하니 머무는 곳도 귀히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지간히 잠을 자도 피로가 가시지 않고, 약국에서 주는 가장 강한 진통제조차 듣지 않습니다. 지난 평생 마취 시켜온 이 몸뚱어리까지 안고 가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낮에는 깨어있으려고, 밤에는 잠을 자려고 갖은 모양의 카페인이며 알약이며 알코올을 마치 연장처럼 꺼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 제 인생 마지막 장소는 ‘칸쿤’이 아닌 다른 곳이 되길 바라고 있으니 희망이란 참, 어지간히도 질기지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