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담자: 오주영
[SESSION 01. 선악]
<불교의 이해>는 대학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 무작위로 고른 교양 수업이었습니다. 담당 교수님 성함은 ‘서혜명’ 이었는데 강의 첫날 벽안의 백인 한 분이 생활 한복 차림으로 등장 하는 것을 보고 강의실을 잘못 찾은 줄 알았습니다.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라면 냅다 도망칠 기세로 한 발 빼고 있었으나 교수님은 이내 유창한 한국어로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불교 수업이니 당연히 ‘스님’일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신부님’ 이었다는 사실에 또 놀랐고, 프랑스에서 의과 대학을 졸업한 뒤 신부가 된 것에 연달아 놀랐습니다. 거듭되는 반전이라, 앞으로가 기대되는 수업이었습니다.
양 손에 턱 괸 채 할아버지 옛 이야기 듣는 양 흠뻑 빠져 들었을 만큼 흥미로운 수업이었습니다. 화자와 청자 모두 불교 신자는 아니었습니다만 불가에는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초월적인 지혜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약식으로 배운 ‘연기론’을 깊이 파고 들었는데, 만물을 바라보는 또 다른 렌즈를 손에 쥔 기분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과 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으니 대학생치고 참 순진한 편이었지요. 새삼 얻은 만화경을 쥔 채 생각했습니다.
-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일까?
어린 시절에는, 공공에게 이로운 것을 선, 해로운 것을 악이라고 배웠습니다. 때로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선이고, 역행하는 것이 악이라고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 알던 선과 악은 보다 깔끔하고 명쾌한 모습이었습니다. 마구 뒤섞인 바둑알 중 하얀 것들만 골라내면 될 일이었으니까요. 어른이 되자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해졌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진데, 이를 따르고자 하니 다른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도 종종, 혹은 훨씬 자주 벌어졌습니다. 누군가에게 해 될 걸 알면서도 버젓이 이익을 취하는 나는 나쁜 사람인 걸까,라는 죄책감에 자주 빠지던 때였지요
최근에는 10분 짜리 애니메이션 <춤추는 개구리>*를 만나는 우연한 행운이 있었습니다. 선과 악의 ‘절대성’이야 자라면서 떼어낸 개념이지만, 새삼 나와 너, 원인과 결과 등, 둘 또는 그 이상으로 구분 짓는 경계의 모호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비슷한 것을 고민했던게, 까마득한 시절 <불교의 이해> 시간이었지요, 아마.
- 햇살 따사로운 수풀 속은 여느 때처럼 평화로웠습니다.
느긋하게 여유 부리며 지날 줄 알았던 오후, 돌연 커다란 뱀이 풀숲 사이로 기어옵니다. 가지각색 개구리들은 사색이 되어 일제히 흩어졌고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남고자 애를 쓰지요. 연두색 개구리 역시 폴짝 폴짝 도망치기에 여념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뭍으로 밀려난 올챙이를 구하기도 하고, 혹은 다른 개구리를 밟고 올라 서는 등 ‘생존’에 비할 바 못 되는 사소한 사건들을 일으키게 됩니다. 불특정 공공과 연두색 개구리, 둘 사이의 관계를 놓고 보았을 때, 죽어가는 올챙이를 구하는 것은 선이고 나 먼저 살겠다 짓밟는 일은 악일 것입니다. 한편 전지적 관찰자가 되어 전체를 내려다 보면 어떨까요. 올챙이를 구하는 행동은 결국 다른 개구리의 죽음으로 귀결되고, 살겠다고 올라간 곳에서 새의 먹잇감이 되는 등 행동의 ‘원인’과 ‘결과’가 보기 좋게 어긋나고 빗나가는 ‘혼돈의 카오스’가 펼쳐집니다. 사후 세계에 닿은 ‘연두 개구리’는 목숨이 여러 개인 게임 캐릭터인 양 매번 새 생명을 얻습니다. 다만 그때마다 원래 자신이 아닌 ‘보라빛 개구리’나 ‘분홍빛 개구리’ 등으로 부활하여 다른 개구리 시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자타 구분 없는 행위들이 이리 얽히고 저리 설켜 운 좋게 사는 놈도 재수 없게 죽는 놈도 있었지만 끝내는 모두가 사후 세계에서 만나게 되지요. 사후 세계에서는 서로를 구분 짓던 빛깔마저 잃고, 모두 똑같이, 하얀색 개구리가 되어 함께 춤을 춥니다.
- 내가 나라서 힘들다면, 너는 너라서 힘들 것임을.
적선 하는 셈 치고 한 일이 어떤 이에겐 극약일 수 있고, 살겠다고 한 일이 죽음으로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만 해둔 ‘연기론’ 중에서도 ‘제법무아’에 의하면, ‘다른 것과의 관계없이 고립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는 것이다.”라는 것이 연기론의 기본 법칙입니다. 나와 연관되지 않은 것은 없으며, 나는 만물에, 만물은 나에게,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분법적인 구조’ 나름의 편리성이 있다고 쳐도, 둘로 딱 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봄이 무방할 것입니다.
- 그래서 ‘데미안(Demian)’은 ‘악마(Demon)’의 상징인 걸까?
헤르만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선’과 ‘악’이 구분 지어진 세계 속에서 살아왔으나, 홀연히 나타난 소년 ‘데미안’은 회의적인 질문을 던지지요. 선악의 정의는 무엇이며, 그 기준은 누가 정했지? 네가 믿는 선은 사실, 선이 아닐 수도 있어. 누군가의 악이 사실 어떤 사람 혹은 그보다 더 큰 어떤 대의에 선이 되는 결과라면, 혹은 제가 지금 선이라고 믿고 행하는 일이, 아주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악이 된다면요. 종교의 모든 교리는 사실, 어른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쓴 동화처럼, 인간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이치를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시킨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생각하고 행하는 일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 걸음 걸음의 무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벌이는 소소한 일들이 만물과 이어져 있고 이 세계에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는 ‘연기론’의 가르침을 복기한다면, 어느 것 하나 하찮은 것이 없습니다.
* 김진만, <춤추는 개구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