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하 심리상담소
심리상담사: 박재하, 35세
- 그림을 저렇게까지 그릴 바에야, 사진을 찍는게 낫지 않을까?
미국 화가 ‘앨리스달튼브라운’ 전시회 입장 전 커피숍에 앉아 대기하고 있던 중 옆 자리 젊은 여성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순간 덜컥, 당황했습니다.
- 아니, 사진전이 아니었단 말이야?!
오가는 길목 곳곳 펄럭이는 홍보물 덕에 작가의 대표작은 이미 수없이 스쳐 지난 바 있었습니다. 전시장을 찾은 이날 이때껏 그게 사진인 줄로만 알았으니 사전 지식 없이 이곳을 찾은 저도 저이지만, 손으로 그려낸 것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세밀하고 정교한 그녀의 작품들도 문제라면 문제였달까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그려내는 기법을 극사실주의라고 하는데, 사실주의가 극에 달하면 사진 전문가조차 구별해 낼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전시 소개에 따르면 그녀의 작품은 사실주의 기법에 ‘가까운’ 세밀화라고 하니, 극사실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이만 접어두도록 하고요.
풍경화와 마주하니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이 미풍을 따라 흘러나오는 입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누에실 같은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 낡게 벗겨진 곳이 황혼에 더 깊게 잠긴 옛날식 주택, 반투명 크림 빛의 커튼 위 꿈처럼 아롱진 버드나무, 빛의 파편을 알알이 싣고 흩어진 푸른 물결 등 오감을 자극하는 요소는 차고 넘치다 못해 평면의 화폭이 버거워하는 듯 보일 정도였습니다. 가로 세로 길이 역시 사람 키에 달하는 정도라 창 너머 신선한 이국의 바다 바람이 닿는 듯한 생동감까지 느낄 수 있었지요. 해외 여행은 커녕 콧바람 쐐기도 쉽지 않은 시국인지라 더욱이 흥행할 수밖에 없는 전시였습니다.
한 숨 트며 대리 만족하는 것 이상으로 이 그림은 틀림없이 사진과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림을 에워싼 펜스가 허락하는 한도 내 바짝 붙어 시야를 최대한 좁혀 보았습니다. 프레임 끄트머리 밑에 주저앉아 아래에서 위로 보는 등 방향을 달리해 보기도 했습니다. 대자연의 신비로 탄생하여 흠결 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완성하는 하나하나의 온전한 ‘원소’들은 사실 크기가 제멋대로인 ‘점’들이자 굵기가 들쭉날쭉한 ‘선’들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새하얀 외벽 위 촘촘히 하나로 엮여 너울진 그림자는 사실, 하늘색과 갈색, 초록색과 회색으로 절묘하게 변해가는 그라데이션이었습니다. 거친 붓질은 그 마다의 고민을 담고 있었고 실수인 듯 아닌 듯 존재하는 대범한 색과 선도 있었습니다. 작품을 수십, 수백 폭으로 나누더라도, 각자가 어엿한, 하나의 추상 작품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지요.
- 왜 이런 일이 하필, 나에게 벌어지는 재수 없는 인생인 걸까.
화폭 구석에서 불현듯 지난 날들이 두둥실 떠올랐습니다. ‘왜’라는 질문만 수 천 번 거듭해왔던 지난 나날이었습니다. 결국 생이란 건 하나의 커다란 퍼즐이 아닐까,라는 가설이 가장 그럴싸해 보였지요. 쓸모 짝이 없어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이 하찮고 못난 ‘쓰레기’들은 알고 보니 퍼즐 조각이라고. 여태껏 그리 여길 수 없었던 이유는 초반에 쥔 것들이 형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어둡고 탁한 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시 이들은 무언가의 ‘그늘’ 혹은 ‘그림자’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코 아름다울 리 없는 이 조각들을 나열하니 너저분할 뿐, 당최 서로 들어 맞는 것은 없었지만요. 그래서 퍼즐이라고 ‘믿고 싶은’ 이것들은 과연 그림이 되기는 할까요, 아니면 그저 재수 없는 인생일 뿐인 걸까요.
앨리스 초기 작품의 중심은 주로 ‘그림자’였습니다. 빛 없이는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기에, 그녀는 시종일관 ‘빛’을 쫓아온 셈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더군요. 인생 초반 우연히 쥐어진 조각들이 무언가의 ‘그늘’이라면 남은 날 쥘 어느 조각은 빛이라는 의미일까요. 만약 인생이 하나의 커다란 그림이라면요.
전시회장 끝에 다다르니 기념품 가게가 나왔습니다. 전시된 그림이 프린트 된 갖은 상품들이 즐비했습니다. 자그맣게 축소되어버린 그림은 그저 ‘당연히’ 아름다울 뿐이었지요. 개중 저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림 퍼즐이었습니다. 저 퍼즐 안에는 검붉은색이나 회색, 매끄럽지 못한 선들, 크기가 제각각인 점, 거친 붓 자국이 담긴 조각들 모두가 담겨있을 테지요. 낱 개 만으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만나 자연스레 제자리를 찾아갈 터. 부드러운 바람 속 금싸라기를 안은 물결이 차츰 차오르면 ‘Long Golden Day’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