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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날 Mar 25. 2023

Q. 나를 냉소적으로 만드는 것은?

A. 자기 계발서, 그리고 신파


자기 계발서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인생 시기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 왔다.


* 패기와 열정이 넘치던 10대, 20대:

자아에 대한 인식이 깨어나는 시기. 한편으로는, 나의 길을 비로소 일구어 나가는 시기. 그 출발점에서 나는 자기 계발서를 신봉하였다. 당시에는 세계적으로 히트 친 서적들이 속속 등장했기에, 가히 ‘자기 계발서의 황금기’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시크릿’ 등의 책이 일러주는 대로 하면, 엘도라도는 곧 내 몫이 될 것만 같았다.


* 사회생활을 시작한 30대 초: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폭풍우 치는 바다 한가운데 조각배 하나를 띄운 격인데, 자기 계발서는 고작해야 나침반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라는 파도가 변덕을 부릴 때면, ‘그들’이 알려준 공식은 적용되지 않았다. 이쯤 되자 자기 계발서는 그저, 오로지 읽는 순간만에만 성공이 손에 쥐어지는 듯한 쾌감을 주는 ‘마약성 개똥철학’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쉽게 쓴 자기 위로 같은.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말라는 신파와 같은. 나아가 ‘정신승리’에 지나지 않는.


이후 오랫동안 자기 계발서를 멀리했다. 그 밥에 그 나물인 듯 뻔한 내용들이 싫었다. 자기 계발서에 수없이 속고 만 나는, 그것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폄하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충 아래와 같은 카테고리로 묶어 버렸다.


1) 개똥철학형: 의식의 흐름대로 쓴 글. 개인의 경험과 의견에 지나지 않는 글.

2) 주지적인 형: 자신의 주장이 정답이라고 단정하는 글. 융통성이 없는 글.

3) 통찰력 부족형: 순진한 글.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글. 어디에선가 듣고 보고 읽은 것을 이리저리 짜깁기 한 글. 작가만의 개성이 없는 한편, 처절한 고민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글. 그러나 명제가 워낙 고전적이기에 반박할 수도 없는 글.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우리를 증명할 명함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증명할 필요도 없는 나 자신이다.”


살다 보면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현실에 적용할라치면 여러 가지 모순과 괴리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귀가 척척 들어맞지 않을 수밖에 없다. 자기 계발서가 주장하는 것이 시대불문 지당한 원칙들일지언정, 정작 현실에서 그 가치들은 쉽게 휘발되고 만다. 또다시 실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이에 이르니 벼가 익듯 고개가 숙여진다. ‘대쪽 정신’은 부러진 지 오래이고, 갈대처럼 바람 타는 법을 배웠다. 마음이 순해지니, 자기 계발서 (혹은 자기 계발서의 성격을 띤 에세이)를 활용하는 방법도 바뀌었다.


마음이 유독 쓰린 저녁, 가까운 지인과 함께 하듯 자기 계발서를 펼친다. 위로 글귀 하나에 소주 한잔. ‘정말 그래’라는 공감이 느껴지만 ‘짠!’ 하며 건배. 해소 못한 울분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봄으로써 위안 삼는다.


순진한 마음을 가졌던 것은 오히려 나였다. 자기 계발서의 주지적 내용을 따라 하면 기필코 성공할 거라는 거창한 믿음을 가졌다. 이제는 그 안에 있는 위로를 본다. 비장함도 심각함도 없이 무심히 툭툭 위로해 주는 듯한 친구인 마냥. 절망의 시기마다 필요한 것은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다는 긍정 사고로의 전환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동시대를 사는 이들의 뻔한 위로가 필요한 것이다. 직설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고만고만한 조언들에 다친 마음을 드레싱 한다. 그리고 다시 내일을 살아간다.


사람의 속을 달래는 것은 결국, 자기 위로와 신파로 귀결되지 않던가.


마지막으로,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의 글귀를 인용한다.


“저도 그거 해봐야겠어요. 정신승리.”

“네, 해봐요. 자기 자신에게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도 능력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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