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형 작가는 그의 소설 <작은 마음동호회>에서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라고 썼다. 책의 맥락에 맞게 위와 같이 표현했을 터이나, 사실 죽음과 삶은 서로의 대척점에 있지 않다. 우리는 살아감과 동시에 죽어가고 있다.
삶이 멀어지고, 죽음이 다가온다. 삶과 죽음은 마주치며 쉽게 일그러진다. 그 일그러짐을 방지하기 위해, 나는 나의 마지막을 고지받고 싶다. 되도록이면 6하원칙으로 받아 보았으면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죽는지. 디데이를 세며 맞는 하루가 새롭고 찬란할 것이라는 사실은 짓궂은 역설이다. 얼마간 나는 좀 더 힘껏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에 다가설수록 엄습하는 공포와 두려움에 잠식당하지 않을 자신은 없다.
원초적인 공포와 맞서면서까지 실마리를 캐려는 이유가 있다. 디데이를 코앞에 둔 시점, 스위스의 디그니타스(Dignitas)라는 단체의 도움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디그니타스는 말기 질병 및 또는 심각한 신체적 또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조직원에게 조력 자살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위스의 비영리 단체이다. 조직원이 되더라도 조력 조건을 맞추기란 쉽지 않다. 불치병이어야 하고, 견딜 수 없는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있어야 하며, 통제 불가능한 고통이 있어야 한다. 즉, 존엄을 지키기 어려운 최후의 경우에만 온전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존엄이란 무엇인가. 자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자기 자신이 바라는 대로 육체와 정신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몸과 마음이 나의 통제하에 있지 못하면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더하여, 가장 원초적인 생리 현상을 해결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른다면 나는 주변인들에게 몹시 미안해질 것이고, 또 수치스러워질 것이다. 병상에 누운 채 꼼짝없이 견뎌야 하는 각종 고통과 불편은 말해 무엇하랴. 아마, 짐승처럼 소리를 내지르게 되겠지.
육체가 천천히 쪼그라들고, 검어지는 과정을 전시하고 싶지 않다. 그전에 스위스로 가는 ‘편도’ 좌석에 올랐으면 좋겠다. 떠나기 전 나는 소수의 지인들과 함께 작은 장례식을 할 것이다. 상투적이고, 촌스럽고, 신파스러운 것은 다 할 것이다. 관계의 마지막은 어차피 모두 신파이지 않은가. 우리는 옛날 사진을 함께 들여다보며 추억을 얘기할 것이고, 함께 울다 또 웃을 것이다. 눈물과 미소로 뒤범벅된 그 사랑스러운 얼굴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마침내 하나하나를 껴안으며 작별 인사를 할 것이다.
일련의 프로세스가 무사히 진행된다면, 나의 육체는 뼛가루가 되어 고국에 돌아올 것이다. 송구스럽지만, 믿을만한 어느 누군가에게 장례를 부탁하려고 한다. 한때 살이자 혼이었던 잿빛 먼지는 폭죽과 함께 바다로 쏘아 올려질 것이다 (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밤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불꽃과 함께 나의 지난날들이 전시되다, 반짝이다, 마침내 사라진다. 나의 사그라짐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모든 이들의 카니발이 되었으면 한다. 가수 가인의 노래 <카니발 (The Last Day)>의 가사와 같이 말이다.
한밤의 카니발의,
그 불빛보다 정말 뜨거웠던.
나 거기 있었다는 걸, 아름다웠다는 걸,
내 안에 담고 불꽃처럼 사라져.
불꽃처럼 빛나고 폭죽처럼 터지는 것. 찰나의 화양연화를 원 없이 누리는 것. 이로써 나는 일생의 소원을 다 이루었다. 단 하나의 미련도 남기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이 온 듯 오지 않은 듯, 간 듯 가지 않은 듯, 조용히 총총 밤의 장막이 드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