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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날 Apr 18. 2023

Q.  오프라인 vs 온라인에서의 나는?

A.  집단과 개인의 합집합

오프라인에서의 나는 ‘집단’을 보다 중시하고, 오프라인에서의 나는 철저히 ‘개인’을 중시한다. 집단에서의 나와 개인인 나 사이에 생기는 괴리가 나를 때때로 불행하게 만든다. 인정한다.


오프라인의 나는 온전한 ‘나’를 이루는데 방해되는 요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은데, 이를 위해서는 집단과의 갈등이 불가피하니 말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오프라인의 자아도 나의 삶의 질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음을 후에 깨달았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한때 ‘일신상의 이유’를 계기로 반강제로 일을 쉬었던 적이 있다. 아뿔싸, 무간도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집단에서 이탈하자 낯 모르는 존재에게 생사여탈권을 뺏긴 듯했다. 불안 강도가 극에 달한 나머지 수시로 공황을 겪기에 이르렀다. 발 닿지 않는 강 한가운데서 무거운 다리를 휘적 거리는 듯하는 느낌이었다. 지위와 소속을 모두 잃은 기분에 대해, 신경정신과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손에 있던 방어구를 모두 잃은 기분이에요. 칼도 창도 방패도 없이 맨몸으로 전쟁터에 서있는 기분이에요. 무언가가 불시에 나를 공격할 것 같은 느낌이에요. 예를 들어, 버스 정류장의 전광판이 갑자기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든가. 스스로를 보호할 장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프라인에서의 나에게 타인과 그들로 이루어진 집단은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따라서 소속 집단에서 내게 부여한 기준을 어기는 일은 거의 없다. 즉흥적으로 연기를 해야 할 일도 제법 자주 일어난다. 소위 ‘현세계’에서의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세계에서의 1) 생계, 2) 제반 생활, 3) 인간관계 중 어느 것 하나 무용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내가 아니라고 할 근거가 없다. 다만 정시 ‘칼퇴근’ 만큼은 보장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회사 정문을 날듯이 가볍게 통과하자마자, 나의 영역을 만든다. 말인즉슨, 노이즈캔슬링 헤드셋을 끼고 퇴근길을 걷는 것이다. ‘이제 누구도 내 선에 들어오는 일 없길.’하고 마음속으로 빈다. 이 행복감은 찐이다.


온라인에서의 나는 온전한 개인이 될 수 있다 (말해 무엇하랴). 집에 도착하자마자 조그만 방 창문에 드리워진 암막 커튼을 친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충분히 밝은 노란 갓전등을 켜고, 전기장판을 켠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방아 찧는 토끼만 없을 뿐 여기가 바로 달나라이고 B612이다. 내가 사랑하는, 또 나만을 사랑하는 장미꽃이 있는. 이곳에서의 나는 표정을 제어할 필요도, 즉흥적인 연기를 펼칠 필요도 없다. '기분이가 몹시 좋아요!!!' 상태이다. 마침 애청하는 채널의 라이브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모티콘을 남발해 가며 채팅에 임한다. 내 생각을 두려움 없이 개진한다. 생각지 못한 마찰이 일어 상처를 입어도 상관없다. 나의 안락한 ‘공간’에서 ‘비대면’으로 벌어진 일이고, 또한 천천히 숙고할 여유가 있으니. 어디까지나 내 개인 영역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한편, 내가 속한 집단 외의 다른 집단을 관찰하기도 한다. ‘현세계’에서의 나와 ‘이 세계’에서의 나를 융합해 본다. 퓨전 2.0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사이좋은 콜라보를 이룬 것 같기도 하고. 내일 점심시간에는 유튜브 채널 ‘슈카월드’의 내용을 소재 삼아 이야기 해  있을 것 같다. 다만, 나는 나의 생각을 첨언할 테다 (카페 옆자리 테이블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듣다 보면, 가끔 앵무새처럼 유튜브 채널의 내용을 읊는 사람들이 있다).


오프라인에서의 나는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고 그것이 진짜 내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동료와 몰래 갖는 오후 2시의 티타임은 즐겁고, 부리부리하게 눈을 치켜뜬 부장의 지적은 아프다. 일탈을 도모하는 공모의 웃음을 교환하다가도, 불과 몇 시간 뒤엔 방비 못한 멘털 공격을 당하는 등 하루 걸러 스펙터클한 이곳. 세상만사 일장일단이던가.


그나마,


오프라인의 나와 온라인의 내가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둘은 정-반-합의 건강한 상생과 순환을 이루며 나의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인간으로서 실체를 갈구하는 것은 본능인가. 아직까지 나는 오프라인의 나를 주 인격으로 삼아 살아간다. 그렇기에 더욱 많은 상처를 감내해야 하지만. 이런 내가 구식인 것일 수도 있다. 구식이라니, 낭만으로 퉁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때로 구식일 필요가 있지 않은가? (꼰대와 라떼는 저리 가라는 전제 하에). 틴더에서 만난 이와 대면하는 날, 설렌 나머지 촌스럽게 장미꽃을 사보는 수줍은 청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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