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준에 따르면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희망’과 ‘절망’ 역시 비현실의 범주에 든다. 사람들은 ‘희망’과 ‘절망’에 경도되어 있고, 그것이 ‘현실’인 마냥 혼동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면, 아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최근 읽은 김연수 작가의 글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위 주장의 계기가 되었다 (김연수 작가 본인은 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미천한 문해력을 ‘풀가동’하여, 대략 아래와 같이 부분 요약해 보았다.
남녀 커플 한 쌍이 있다. 그 커플은 모종의 비극적 이유로 동반 자살을 하게 된다.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동일한 임사 체험을 하게 된다. 현재에서부터 과거로, 시간을 역행하여 다시 한번 삶을 살아보는 것이다. 그들은 기쁨과 설렘이 가득한 둘의 첫 만남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더불어 ‘이번 삶’은 그 기쁨을 향해 가는 여정임을 인식하게 된다. 정해진 과거를 향한 믿음과 기대를 가진 채, 커플은 하루하루를 더 충실하게 살아가게 된다. 곧 마주하게 될 날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삶’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날들일지언정 말이다.
나의 요약이 졸속할 뿐만 아니라, 부정확할 소지가 있어, 본문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여 본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도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p.29, 김연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종종 (또는 대부분) 절망으로 끝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를 파악하기에 앞서,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과연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고 싶다.
첫 번째, 기대. 인간이 희망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는 현재에 절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희망과 절망, 두 행위는 모두 ‘기대’로 부터 비롯된다. 현재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그러나 기대만도 못한 현실에 따른 희망과 절망이 아니던가. ‘기대’에는 기준값이나 절댓값이 있는 것이 아니니 측정할 수가 없다. 너무나도 막연하다. 서두에서 언급하였던 것과 같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다. 따라서 비현실적인 것으로 분류해 보았다.
두 번째, 성패. 희망과 절망이 비롯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즉, 목표했던 바의 성패 여부이다. 성공과 실패에 대한 나름의 기준은 가지각색일 것이며, 그 내용 또한 극히 개인적인 것일 테다. 따라서 이 역시 마찬가지로 ‘상대적’이며 계량할 수 없다. 무엇이 성공인가?라고 묻는다면 만인이 각기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보이는 모습을 부러워한다면 성공한 삶인가? 가난할지언정, 자존과 행복으로 내면이 충만하다면 성공한 삶인가?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성공한 삶인가? 성공의 기준은 돈인가, 권력인가, 행복인가? 연수입 2억의 사람은 연수입 5천만 원의 사람보다 절대적으로 행복한가? 수만 가지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세 번째, 시간. 희망은 ‘미래’에 대한 기대이며, 좌절은 ‘과거’에 대한 회한이다. 그러나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즉 인식의 패턴이 완전히 바뀌어, 이미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까요?... (미래의 일)을 원인으로 지금 두 사람이 이렇게 내 앞에 앉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이토록 평범한 미래>, p.29, 김연수
화자는 시간이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간다는 전제를 뒤엎는 일종의 ‘사고 실험’을 한다. 시간의 흐름이 절대적이라는, 심지어 시간이 존재한다는 ‘상식’ 자체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순행한다는 ‘관념’은 사실 사회적 컨센서스, 즉 합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열역학 제2법칙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이렇게 보면, 삶을 긍정 또는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세 가지 큰 축, 즉 ‘기대’, ‘성패’, ‘시간’ 모두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다. 따라서 ‘현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희망, 절망, 성공, 실패는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아니던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모두 특정 ‘현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일 뿐이리라.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 ‘도파민의 탄생과 죽음’ 뿐인 것은 아닐까,라는 대담한 생각을 해본다. ‘도파민’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나무위키가 가장 쉽게 설명하고 있어 인용한 것이니 양해 바란다).
“인간이 무언가를 하겠다고 결심하거나 하고 싶다는 의욕을 느끼게 해주는 게 이 도파민이며, 인간이 일을 해내어 얻는 성취감이나 도취감 또한 도파민이 없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감정이다. 도파민은 이러한 의욕을 샘솟게 해주는 신경 전달 물질이기 때문에, 분비되면 될수록 쾌락을 느끼며, 두뇌 활동이 증가하며 학습 속도, 정확도, 인내, 끈기, 작업 속도 등에 영향을 준다.”
도파민은 행동과 인식, 자발적인 움직임, 동기 부여, 처벌과 보상에 관여한다. 앞서 ‘관념적인 것’으로 분류하였던 희망과 기대, 의욕, 성공에의 쾌락, 실패에의 좌절 등의 배후에는 ‘도파민’ (외 기타 신경 물질)이라는 ‘실체’가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최대치의 도파민을 달성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닐까?
다만, 도파민의 한계는 명백하다.
“하지만 인체는 항상 항상성을 유지하려 한다. 도파민이 지나치게 많을 경우 그와 비례하여 도파민 수용체가 줄어드는데(Down-regulation), 이는 인체가 스스로 도파민에 대한 감수성을 낮추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마침내, 연봉 10억 원을 달성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혹은 100억 원짜리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가정하자 (획득한 금액 크기와 도파민의 분출량이 정비례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목표 또는 기대 이상을 달성하였다는 사실이다). 도파민의 분출로 얼마간은 행복하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성의 동물이다. 도파민의 수용도는 점차 낮아지고, 당신은 일상이 다시 평범하고 지루해졌다고 느끼게 될지도모른다. 어쩌면 5천만 원의 연봉을 갓 달성한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불행’할 수도 있겠다. 부차적인 속앓이가 따라올 가능성도 있다. 당신의 재산을 넘보는 친척들이나, 재산을 탕진하는 자녀의 불성실한 태도 같은 것들 말이다. 이전보다 더욱 불행하다고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알겠는가?
반대로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는 당신을 가정해 보자. 어느 날 당신은 사소한 목표를 세운 뒤 그것을 달성한다. 도파민이 분출되면서 당신은 오랜만에 만족감에 젖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유독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도파민의 항상성이다. 아무리 뜨거운 연애도 식기 마련이고,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성취감에도 무뎌지기 마련이다. 희망은 충족될 것이며, 좌절은 회복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언젠가 일상이 되고 만다는 것은 보통의 진실이다. 종국에 맞이하게 될 것은 빛나는 미래도 끝없는 추락도 아닌 그저 ‘이토록 평범한 미래’인 것이다.
첨언. 책에서는 또 다른 커플이 등장한다. 이 커플은 동반 자살을 결심했지만 끝내 포기한다. 훗날 커플은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된다. 둘은 동반 자살하려던 시점의 과거를 회상한다. 그리고 삼겹살이 지글지글 타는 고깃집에서 건배를 하며 말한다. 우리는 결국,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와있노라고.
과거의 나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싶은가,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크게 실패하였는가? 굳이 비참해할 필요 없다. 꽃길만 걷는 미래를 기대하고 있는가? 그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너의 도파민은 끝없이 순환할 것이며, 그래서 결국 너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안착하게 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