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이 숲을 죽이고 있다.
나는 1936년에 태어났습니다. 서울 변두리의 기와집에서 태어나, 학교는 초등학교까지만 다녔습니다. 그 시절엔 여자아이가 더 배우는 걸 바라보는 분위기가 아니었죠. 열네 살 되던 해, 전쟁이 터졌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피난을 가는 길. 나는 끊어진 한강다리와 그곳에 살고자 매달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날 나는 이 나라가 국민 모두를 데려가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삶을 이어갔습니다. 공장에 들어가고,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이었죠. 기회는 없었고, 원망할 틈도 없이 손을 움직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린 전쟁을 겪었다고. 누군가는 보릿고개를 넘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IMF를 견뎠다고. 맞습니다. 모두의 인생은 대부분 힘들고 고달팠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고단함엔 틈이 있었습니다.
저 높은 바위산 자락 틈새에 나무 한 그루가 자라듯, 아무리 험한 시절이어도 희망은 자랄 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이미 자리잡은 나무들이 뿌리를 깊숙이 내린 비옥한 땅에서, 이제 막 싹을 틔운 새 나무는 햇볕도, 물도 받지 못한 채 질식하듯 사라집니다.
뿌리를 내릴 틈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자라지도 못하고 잊혀지는 거죠.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이 땅을 숲이라고 부른다면, 지금은 나무끼리 양분을 나누는 게 아니라, 서로의 뿌리를 갉아먹는 구조가 되어버렸다고요.
겉으로는 울창한 숲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선 자리를 먼저 잡은 나무들이 아직 자라지도 않은 나무에게 양분을 빌려준다며 뿌리를 감고 있습니다. 나중에 돌려주겠다 말은 하지만, 그 새싹은 끝내 자라지 못합니다.
그걸 요즘 사람들은 ‘국민연금’이라 부르더군요.
양분이라며 빼앗아가고, 나중에 돌려준다지만, 그 새싹이 자랄 공간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죠.
얼마 전 손주 녀석이 보여준 다큐멘터리에서 그런 나무를 봤습니다.
아마존 어딘가에 있는, ‘알멘드로 나무’라더군요.
번개에 맞아도 혼자 살아남는데, 주변 나무는 다 타버린다고 했습니다. 그 얘길 들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지금 세상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자리를 차지한 나무 하나가 번개에 맞은 채 쓰러지며, 주변의 모든 어린 나무를 함께 태우는 구조.
그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라고요.
나는 다리가 있던 시절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리가 있었던 적조차 모르는 이들이 강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걸 봅니다.
그래서 더는 말하지 않으려 합니다. “왜 못 건너냐”고.
대신 묻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