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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니즘에 이골이 난 돌멩이의 잃어버린 일기장

027. 드라마는 없는 거거든

by 한량돌



#함께하면 더 좋을 플레이리스트

https://www.youtube.com/watch?v=KsWmhAisQdw

<Refresh Your Mind - NEOTIC>






새해 일출을 보고 돌아온 지 한 주가 벌써 다 되어간다.

금연 역시 7일째이다. 이번 주말, 친구들과의 약속이 관건이다.

그놈들 다 흡연자다. 그냥 만나지 말까.. 허허.



일출을 보러 간 곳은 강원도 고성.

갈 때는 집에서 3시간이 걸렸는데, 돌아올 때는 4시간이 걸렸다. 와 이렇게나 막힌다고?

새해 기념으로 일출만 본 건 아니었고, 각 지방의 이름난 둘레길들을 꾸려놓은 '코리아둘레길'의 고성 코스를 따라 몇 시간을 걸었다.


그렇게 집으로 겨우 돌아오니 천 근 만 근 한 몸.

비상이다. 이건 120% 몸살인데. 허리를 펼 수가 없다.

대충 밥을 때우고 씻지도 않고 침대로 들어가서 눈을 꿈뻑꿈뻑.

'아, 내일 작업장 못 나가겠다고 할까.'

'아니, 그냥 그만두겠다고 할까.'


내일이면 다시 시작될 하루를 몸도 아는 걸까.


아무리 새해의 첫 태양을 바라보며 나은 삶을 다짐해도

차분한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걸어 목적지에서 성취감을 느껴도

깔끔히 목욕재계를 하고 신년 계획들을 세워봐도


나의 고민과 어려움이 있는 현실은 드라마처럼 휙, 바뀌지 않았다.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수영장 바꾼다고 수영하게 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듯.

내가 변하지 않으면 '1년짜리 세계여행 경험'을 가진대도 내일의 나는 지금과 똑같이 우울할 것 같다.




요즘 작업장이 연이은 인사 이동과 물품 재배치(?)로 혼란스러운데, 나도 그 파도에 중심을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요즘 별 얼퉁없는 일들이 자주 생기는데 딱히 적고 싶지 않다. 기분 더 나빠질 거 같아..)

평일 내내 이러니 죽어라 일하는데도 하루 끝에 다다르면 뭔가를 해냈다는 느낌이 안 든다.

물레연습은 멍멍이나 주고 다 던지고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이 감정 상태가 주말까지 이어져서 개인 작업도 안되고, 글도 못쓰고..

내내 병든 닭처럼 누워있다가 밤이면 술에 절어서 제대로 쉬어주지도 못하고.. 다시 월요일에게 명치를 맞는다.


이게 지금 몇 주 째인지 모르겠다.



한동안 푸바오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사소한 감정을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는 편이라

불만과 짜증 가득한 얼굴을 보여주면 서로 더 힘들어질까 봐.

실제로 푸바오와 같이 저녁을 먹은 지도 몇 주 됐네.


며칠 전 정신없이 정리를 하고 택배를 싸고 있을 때였다.

스윽 푸바오가 손에 든 믹스커피를 훌쩍 마시며 다가오더니 일이 얼마나 진행됐는지 물었다.

아직 멀었다는 내 답변에 푸바오가 말했다.

- 음...... 왜?


몰라서 묻나???

지금 몸이 하나고 할 건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데 어떻게 다 쳐내라고..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제한이 있어가지고 예상보다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자꾸

- 왜? 왜?


하기에 살짝 터져있던 불만 주머니가 주욱 찢어져 와락 말을 쏟아냈다.


솔직히 너무 힘들다. 매일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일이 너무 밀려서 준비해야 하는 것들은 점점 늦춰지고,

요 근래 만족스럽게 하루가 마무리된 적이 없는 것 같다.

(힘만 드럽게 들고 물레 연습도 못하겠고 일도 하기 싫고 아주 그냥 아오 때려치우고 싶다고 돼지야!!)

라고 말했다.


푸바오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 박자 쉬고 말했다.

- 네가 일을 전부 끌어안고 다 해내려고 하면 안 돼.

지금같이 바쁠 땐 일이 되게 하는 게 중요하지.

- 사람한테 일을 맡기는 건 위험을 감수하는 거야.

나도 너한테 일을 맡기는 거 당연히 걱정 돼.

그리고 사고가 생기면 내가 감수를 해야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일들을 다 해나갈 수가 없어.

혼자서는 절대 다 해낼 수가 없다고.

못 믿겠어도 동료들에게 부탁하고 가끔은 지시도 하고 그래야 하는 거야.

이제 내일 하고 퇴근해. 집 가서 좀 쉬어.



그는 본인을 도와 작업장 관리를 하는 게 내 주 역할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일일 알바처럼 이리저리 구르라는 게 아니라.

아무리 경험이 없기로서니 그래도 관리직이라고 뽑아놨는데 일이 진행이 안되니 그도 답답했겠지.

(실제로 여건이 열악한 건 맞다. 내가 편히 어르신들에게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기도 그렇고..

그래서 곰탱이 당신도 오늘 6시 반까지 택배 쌌잖아!ㅋㅋ // 추가 인력은 물론 계속 구하는 중이니.. 좋은 날 오겠지.)


일을 잘하는 사람이란 건 일이 되게 하는 사람. 일이 잘 굴러가게 하는 사람.


그래, 알고 있었음에도 애써 외면하고 왜 내가 모든 걸 다 짊어지고 가려고 했는지..

아직도 이 좁은 그릇을 넓힐 깜냥이 안되나 보다..



목욕탕에 갈 때면 나는 냉탕을 동경하는 사람이 된다. 저 차가운 물에 온몸을 적시면 얼마나 상쾌할까?

작은 용기를 내어 냉탕으로 향해본다. 찔끔찔끔 간을 보다,

어휴 차가워. 안 되겠다.

다시 평온한 온탕에 찌그러져 앉아 냉탕을 바라볼 뿐이다.


내 인생도 여태껏 그렇게 살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마주한 벽을 이겨내야, 넘어 서야 성장한다.'


동화에서 나올 법 한 멋쩍은 그 진리를 자꾸 무시하고 산다.


프리랜서를 꿈꾼다고는 하나, 앞으로 정말 개인 사업을 하게 될지, 누군가의 밑에서 계속 구르면서 살지는 모르는 것이다.

어쨌든 주어진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는 자기한테 익숙한 삶에 대한 태도나 문제 해법에서 가끔은 멀어질 필요도 있는 거다.

견디기 어려운, 싫은 것들에게 나를 던져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뭔가를 배우고 익힐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동경하는 가치가 있다면 손이 터지든, 두통에 몸서리치든

흉내라도 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자꾸 간만 보다가 물러서는 거냐고 이 녀석아.


올해는 벽을 이겨내는 경험을 많이 해봐야 한다.

이른 건 아니지만 여전히 늦지는 않았다.

동경하는 쪽으로 계속 걸어갈 것이므로.


지난밤, 푸바오와의 카톡을 켜놓고 깜빡이는 커서를 꿈뻑꿈뻑 바라보다가

끝내 그만두겠다는 말을 못 하고 그냥 뻗어버린 내가 기특해지는 밤이다.

아직 더 나은 내가 될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니.


아무튼 일기도 한 편 더 써냈고!

아휴 졸려라.. 고생 많았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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