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6일차 마스터 투어 랄랄라
부여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토요일. 첫 번째 주말.
예정된 일정대로라면 하루 종일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이다.
부여에서의 한 주는 ‘우주를 누비게 될 누리호가 이런 심정일까?’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래,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자신이 올라 탈 발사대의 완성을 기다리는.
분명 그 정도로 황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한 해 동안 몸과 마음에 쌓인 씁쓸함은 여전히 이곳저곳에 박혀있었나 보다.
자유 시간이 주어지니 놈들이 다닥다닥 정신을 긁는다.
고행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악한 기운을 땀과 함께 날려야 한다.
웃으려고 발버둥 쳤던 2025년.
그 감정적 하강 운동이 소강 상태에 이르렀던 10월 즈음이었을까.
고마운 친구들을 통해 돌파구를 얻어낸 뒤에는 짬만 나면 그들과 함께 등산을 다녔다.
심지어 제주도에 가서도 기어코 한라산 백록담을 만나고 왔다.
(아, 비슷한 처지에 놓인 친우들과 자유로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란 사는 날이 쌓일수록 얼마나 귀중하고 각별한가!)
그래, 산이다. 산에 가자.
거의 다 죽어가는 이 우울감을 끝장내러.
.
.
.
근데 일정이 바뀌었답니다 ? _ ?
(물론 운영진에서 변경 공지는 미리 해주었습니다 허허껄)
# 함께하면 좋을 배경 음악
https://www.youtube.com/watch?v=I6UHeODmFQQ&list=RDI6UHeODmFQQ&start_radio=1
<재즈독립서점 - [playlist] 잠시 멈추고 삶을 만끽하는 시간>
다음 주 토요일에 예정되어 있던 ‘마스터 투어’가 오늘로 변경된 것인데, 차라리 이렇게 바뀐 일정이 더 좋았다.
덕분에 한 주가 더 남은 상황에서 부여에서 만난 이들과 조금 더 가까워지게 되었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날의 멜랑꼴리 한 마음을 들킴 없이 잘 주워 담아 올 수 있었으니까….ㅠㅠㅠ
-
갈 길이 멀다. 오늘의 일정을 시작해 보자.
일단 ‘마스터’란 무엇인고 하니, 마스터는 어떤 인물을 말한다.
아버지 뻘? 이신 부여의 남성이다. 강한 이타심을 풍기는 낭만 넘치는, 재주 넘치는 어른이다.
상상위크 운영진들을 포함한 부여 청년들에게, 나아가 주변인들에게 삶의 힘을 보태며 살아가는
재밌는 어른이다.
이전 상상위크 캠프에서 참가자들을 데리고 부여 풀코스 여행 일정을 도맡아 주신 적이 있는데
반응이 좋았는지 이번 기수에서도 시간을 내어 도와주신다고 했다.
그에 대해서 딱 이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
그날 오전 10시. 이주 청년들이 일궈낸 아지트 ‘소행성 B’에서 처음 마스터와 마주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나의 워너비인 백발 머리에 단정한 옷차림.
살짝 처진 눈매에서 흐르는 여유 있는 웃음. 크지 않았으나 강건해 보이는 체구.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그는 우리를 백마강으로 데려갔다.
갈대가 우거진 강변에서 자전거를 먼저 타자고 하셨다.
그래유, 거기 자전거 타기 너무 좋은 곳이더구만유!
도착 전에 요상한 모양?의 관망대에 올라 부여를 한눈에 내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마스터는 동서남북으로 보이는 부여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허나 나는 이미 집에서 하루 종일 주인을 기다리던 댕댕이가 주인 문 여는 소리에 희뇨를 흩뿌리듯,,
자전거 탈 생각에 잔뜩 달아올라 있었기에 얼른 내려가서 페달을 밟고 싶었다.
마침내 관망대에서 내려와 자전거를 못 타는 멤버들을 공원에 먼저 내려주고
(여러분 제발 자전거 연습하세요으어ㅓㅓ어ㅠㅠㅠ 이 맛을 못 보다니 바보들)
나머지는 궁남지에 위치한 대여소로 향했다.
서울에 ‘따릉이’가 있다면 부여엔 ‘백제 씽씽이’가 있다.
이용법은 비슷했으나 큰 차이가 있다면 백제 씽씽이는 전기 자전거인 데다가 무료라는 것! (2시간 동안 인가? 시간제한은 있다.)
부여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를 꼽으라면 백마강변에서 자전거를 탔던 이 순간을 꼽겠다!
친구들 데려오면 무조건 태워야지.
-
마스터는 ‘꾼’이다.
자전거와 산책으로 실컷 배가 고프게 한 뒤에 점심 식사를 하러 갔다.
식당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었고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계속 나는데
조수석에 타서 망정이지 멤버들하고 가까이 앉았으면 배 속에 두꺼비가 사냐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자전거 위에서 햇살을 맛나게 누렸다는 것.)
한참을 달려 그의 ‘부여 맛지도’에 등록된 된장 수제비집에 도착했다.
들어가 보니 엄청난 오픈 키친이라 부러 주방 가까이 앉았다.
멸치 육수에 된장을 풀어 만든 간간한 수제비.
엄청나게 특별한 맛은 아니었으나 그 공간에는 웃음이 아름답던 사장님이 있었고
정신없이 한 그릇을 완주할 만한 수제비와 맛깔난 김치가 기운을 북돋았다.
재 방문 의사 너무!! 있다.
-
깔끔 따뜻하게 속을 더운 뒤엔 무엇을 해야 좋을까?
그렇다. 바로 따끈한 차 한잔을 때리는 것이다.
마스터는 구룡면에 위치한 오래된 구멍가게로 우리를 데려갔다.
구룡 슈퍼라는 이름의 작은 구옥은 주인장의 오밀조밀한 손맛으로 길들여져 있는 카페가 되어있었다.
의자며, 테이블이며 수작업을 통해 만들었는지 약간은 위태롭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도의 평온을 느끼기에는 오히려 좋았다. 그가 내려준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느끼는 안온함이 상당했기에.
나와 멤버들은 그 작은 공간에서 가깝게 붙어있었다.
역시 누군가에게 가까운 거리를 내어주는 것이 어색한 터라
느릿한 드립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에는 테이블 한쪽에 놓인 ‘부여 전도’를 한참 들여봤다.
나는 어디서 살게 될까? 구룡면이면 괜찮을까? 은산면은 어떨까? 그래도 결혼하기 전에는 읍내에서..
절실한 망상을 뿌리다가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제목의 작은 시집을 펼쳤다.
.
.
그럼 그렇지. 역시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시를 곱씹기 어렵다.
‘짧게 쓰지 못해 길게 풀어씁니다.’라는 말이 있듯 시라는 것은 심오하고도 복잡한 예술이니..
나같은 멍충이도 언젠가는 시를 쓸 수 있으려나?
나른한 몸을 깨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오늘도 날씨가 참 좋았다.
우리는 이때다 싶어 필름 카메라를 들어 서로를 담고, 작은 시골 마을의 정취를 담았다.
-
다음은 세계 최대의 와불이 있다는 ‘미암사’로 향했다. (아무리 봐도 그 정도는 아닌데..?)
언덕을 오르고 오르자 웬 황금 보살님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미암사의 두 번째 시그니쳐인 하얀 바위로 오르는 길에도 황금 보살님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조금 많이 기괴한 느낌이었다. 분명한 건 밤에는 못 올 것 같다.
약간의 언덕을 올라 미암사 하얀 바위에 도착했다.
전시에 바위에서 쌀이 나왔다고 했었나..? 기억이 가물하다. (제발 메모…!!! 제발 제때 글쓰기…!!!)
아무튼 가볼 만한 곳이니 부여에서 장기 여행을 한다면 가보시라.
주지 스님은 유튜브 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요즘 종교인들 사이에서는 라이브 방송 능력이 필수 덕목인 것 같다.
파이팅입니다. MC 주지.
-
와;; 글로 적으니까 이 날 진짜 바쁘게 돌아다녔네.
이제 7부 능선 넘었습니다. 마음 굳게 먹으세요.
다음 코스는 아마도? 마스터가 아끼시는 작고 오래된 성당이었던 것 같다.
따사로운 햇살을 건너 자그마한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과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온 색색의 파편들이 포근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분명 어둑하고 차가운 공간이었지만 강단 좌측의 마리아상이 주는 그것도 이 포근함에 한몫했으리라.
강화도에서 몇 번이고 방문했던 그 오랜 성당과는 또 다른 감상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단체 사진을 찍고 다음 여정을 떠나려던 중, 신부님과 신자분들이 나와 멤버 일부와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걸 멀-리서 보았는데 그 모습이 퍽 따뜻하고 평화롭게 보였다.
부여 참 이상한 곳이야. 약을 멕였는지 원.. 참.. 아휴…
-
다음 코스는 오——래된 은행나무 성지.
이 부분은 손가락이 너무 아파서 사진으로만 대체 하겠읍니다….
-
다음 코스는 읍내에 위치한 ‘신동엽 문학관’이었다.
<태워다 줘, 먹여 줘, 보여 줘> 3줘 일정이었지만 서도
발발발 부여 곳곳을 돌아다니느라 슬 해가 떨어질 무렵 도착한 문학관에서 우리는 지쳐있었다.
그러나 눈을 퍽 뜨이게 할 만한 영감이 넘치는 공간이었음을 곧 알게 되었다.
우리가 문학관으로 들어갔을 때는 한창 무언가를 주제로 한 세미나가 열리고 있었다.
들어가도 되려나.. 어떡하지..? 하는 찰나에 문학관 관리자분께서 나오셔서 ‘관람하셔도 괜찮다. 혹시 관람을 도와드려도 되겠느냐?’라고 하셔서 개꿀 도슨트를 받으며 문학관 관람을 시작했다.
시인 신동엽.
남다른 눈빛의 준수한 외모도 외모이신데 아니, 입고 계셨던 옷들이 왜 이리 힙한가?
나의 사랑, 동묘에서 발견했다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가졌을 만한 옷이다. (문학관은 당장 굿즈로 내놓아라!!!)
특히나 기억에 남던 것은 부인과 나누었던 편지.
몇 장의 연서들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 날은 감사하게도 문학관 내에서 머리를 감각적으로 세팅하신 도예 작가님의 전시도 관람할 수 있었다.
댐 공사로 수몰된 당신의 기억 속 동네를 떠올리며 작업하셨다는 작품들.
언젠가 만들어보고자 했던 ‘라쿠 소성기법’을 거친 작가님의 작품들을 보며
얼마 전까지의 지-난했던 여주 시절의 감상들이 떠올랐다.
(이래서 다양한 경험은 세상을 쪼끔 더 진득하게 감상할 수 있게 한다. 나는 죽을 때까지 경험충으로 살래.)
-
석식 전 부여 풀코스 마지막은 백마강 노을 보기.
(낭만을 아시는 어른을 곁에 둔다는 것은 자타공인 명주를 내 술장에 모시는 것과 같다.)
좌측에는 황금 들녘, 우측에는 대규모 갈대 군락지를 끼고 생각보다 많이 내려갔다.
15분 정도를 달렸을까? 수자원 공사의 작은 관리동에서 차를 멈추고 금강 하구둑으로 향하는 백마강 끝변을 걸으며 노을을 기다렸다.
마스터께서는 나중에 백년가약을 할 사람과 이 길을 걸으며 사랑을 속삭이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암요 암요…)
다만 이 길은 자전거 코스와도 길을 나누니 적당히 쪽쪽이며 전후방을 제발 주시하며 걸을 것. (그 정도로 로멘틱 했다 이겁니다..)
-
오늘 예정된 저녁 메뉴는 두부 두루치기였다.
꽤 긴 거리를 걸은 터라 배 속에서는 다시 두꺼비 파티가 열렸다.
빨리 중앙시장으로- 여기 응급 환자 있어요오오오오…
두루치기라고 해서 돼지고기가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고기는 없었다. (아니 두루치기에 왜 고기가 없ㄴㅜ!!!!!)
대신 통통한 오징어가 들어있었다.
뭐 양념장이랑 반찬들이 이미 사기라 기어이 두 공기의 밥과 한산 모시 한 병을 땡겼다.
여기도 재방문 의사 무조건임!
-
마스터 투어는 고객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요즘 유행하는 올 인클루시브 (All-Inclusive) 그 자체다.
밥을 든든히 때리고 다음 코스는 술이냐? 커피냐? 였다.
이미 한산 모시로 몸이 젖어버린 나는 술자리를 택했지만
다른 멤버들은 이 상태로 술까지 마시면 마스터 당신을 향후 200일간은 보고싶지 않아 할 것 같다는 기세를 뿌리며 카페를 택했다.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지 뭐.
그래서 방문한 카페.
부여 읍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환상적인 곳이었다. (음료 맛도 GOOD)
하여간 여기 카페는 남다르다.
음료도 탁월하고.
중간에서 카페 굿즈도 팔고.
비즈니스 하기에도 적합해 보이는 곳.
여기서 약간은 깊은 마스터의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스터는 사업으로 이미 큰 돈을 벌어본 사람이었고 (하이고 얼마를 얘기하던지 상상도 모덥니도.)
해외에 있는 자녀분들 이야기와 사랑하는 부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향후 여자친구(?) 만들기 계획도 들을 수 있었고
아,, ‘0’의 통장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특히나 기억에 남는다.
이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부여에서 마스터를 찾으시라.
검증된 공공재이시니 당신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힘 빠지고 눈물 나는 그 순간
마스터는 항상 당신 곁에 있을 것이니…
-
전에 같이 숙소를 쓰는 멤버들끼리 일정이 끝나고 넷플릭스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한창 ‘1일 1글’에 불타고 있을 때로, 노트북과 씨름하고 있느라 단체 관람에서 빠졌었다.
‘그냥 같이 볼 걸..’하며 못내 아쉬웠는데, 우와 오늘도 단체 관람을 하기로 했다. 랄랄라라랄
(만약 캠프 기간 내내 1일 1글을 유지했다면 부여에서의 흥취를 나는! 더욱 풍부하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놀 땐 놀고, 할 땐 하는게 맞다!! 좀 해라 좀 제발 좀좀 좀!)
덜 피곤했던 멤버 셋이서 맥주를 까고 영화를 틀었다.
오늘 볼 영화는 셀린 송 감독의 <머티리얼리스트> (: 물질주의자라는 뜻)
커플 매칭 회사에서 차근히 커리어를 쌓고 있는 여주 /크리스 에반스 분
여전히 처량한 연극배우이자 각종 전문 알바생인 남주 / 다코타 존슨 분
출중한 외모와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뭔가를 숨기고 있는 남주/ 페드로 파스칼 분
음..!
영상미도 좋고 노래도 좋았다. 해피 엔딩인 것도 좋았고.
하여간 영화를 잘 고르는 친구가 곁에 있으면 삶이 참 풍요로워진다.
( *잡설) 그간 내가 골랐던 영화 목록 → 물괴, 보스, 미드소마, 곤지암 등)
특히 남자 주연을 맡은 다코타 존슨의 연기를 보면서 어금니를 깨무는 순간이 많았다.
한 때 ‘내가 자랑할 것은 너의 남자라는 것 밖에는 없어.’라며 열패감에 휩싸여 살던,
또 한 번 나를 낮추며 무너져갔던 시릿 저릿한 기억이 베어 나왔다.
(그런 남자는 버림받는 결말 말고는 가질 것이 없다.)
같이 보던 멤버들에게 ‘저런 남자 진짜 최악이지?’라고 물었던 건 아마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등신아. 너 하나도 안 못났어. 잘하고 있어 너.”
분명 마스터 투어가 빡쌔긴 빡쌨는데 왠지 모르게 벌써 자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로 소중한 이 밤을 갈무리 짓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엔딩 크레딧이 한창 흐르고 있을 때 감사하게도 캠프 멤버 한 명이 단관에 합류하면서
나는 그 유명한 ‘나는 SOLO’를 처음 보게 되었다.
이렇게나 누릴 것이 많은 세상에서 내 취향에 혼자서는 절대 클릭하지 않을 콘텐츠지만
‘여자 1번이 어떻네, 남자 4번은 shit 이네….’하며 거세된 죄책감을 나눠 덮은 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뉴 미디어의 신선한 충격에 저항 없이 깔깔 웃기도 했다.
100분 정말 금방 가더라.
하여간 다 같이 모여서 남 욕하는 건 정말 재밌단 말이지.
-
내일은 또 어떤 두근거리는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피곤은 한데 피곤하지 않다.
자고는 싶은데 자고 싶지 않다.
#부여안다 #부여 @buyeo_anda (instagram) #부여군 #부여군청 #부여2주살이 #부여살이캠프 #상상위크 #한달살이 #인구소멸지역 #나는남부여의공주부여주다